흙과 같이 하는 일은 변화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 한나절 일 하다가 허리 펴 보면일 한 것이 어디 있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돌 밭을 가꿀 때도, 거기 씨를 뿌렸을 때도, 집 마당을 고를 때도 그랬다. 마치 자연이 하는 일처럼 나중에야 아! 하고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런 조그만 변화들이 사람이 저 너머 세상의 신비를 만나러 갈 때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게 되는 것이다. 개미가 땅을 기어 겨울양식을 구하 듯, 새가 오랜시간 둥지를 치 듯, 쇠똥구리가 제 집을 고집처럼 뭉쳐 나가 듯 보이지 않는 땀들이 인류의 땅을 경작해 나가는 것이다.
언제 저 해가 동에서 서로 지는 것을 어긴 적이 있는가. 태고 적부터 강물이 흐르고, 바다가 넘실거리고, 산맥이 굽이쳐 뭍이 생겨나는 신비가 그친 적이 있었던가. 일상이란 조금씩 움직이니 어리석은 인간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만히 역사를 거슬러 오르다보면 때론 숨이 차다. 우리의 일상은, 움직이지 않는 바위처럼, 지나가는 매일처럼 변한 것이 없어 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큰 변화에 사람은 휩쓸려 산다. 너무 큰 파도는 느끼지 못하듯이 잔물결에 신경을 쓰는 나 같은 보통사람은 어쩌면 그 일상이 더 애틋하리라. 하긴, 그 일상 없이 어디 역사가 만들어지는가. 시작의 아침과 땀 흘리는 낮, 감미로운 저녁과 침묵의 밤.
그 침묵은 다시 빛을 데려와 창조의 아침을 눈뜨게 한다. 그것은 평범하게 보이는 일상이나 창조의 근본이 된다. 평범한 일상의 자유를 알아차린다면 그 사람의 일상은 아침처럼 늘 새로울 것이다.
난 일상의 노래를 부르려고 버린 것들이 많았다. 대중보다는 그늘진 곳의 사람이요, 생색보다는 명분을 택했다. 사람의 일상이란 숨과 같은 것. 어디 누구에게 내놓고, 드러내고 할 것도 없으니, 사람 앞에서 노래 불러야 할 직업을 가진 내겐 나름대로 콤플렉스가 거기 숨어 있다. 늘‘명분’과 ‘홍보’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몇해 전, 연초에 연하장에도 그렇게 썼고, 혹 부탁하는 이가 있어 사인을 해 줄 때에도 늘 쓰는 글이 있다.
‘나무가 그늘을 만들듯, 그 일상을’
실바람에도 흔들리는 잔 나무들과는 달리, 둥치 큰 나무들은 더욱 무료하고 지루하게 보일 때가 있다. 거기에 세월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세월을 관조하는 심심함이다. 삶에 끌려가는 일상이 아니라 산꼭대기 올라가 내려다보는 큰마음이다. 성실함으로 그 걸음을 걷되, 어린아이가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리듯 사심이 없는 일상이다. 구름이 무심히 떠다니듯 그 일상은 자유로워야 한다.
좁혀보면, 집안에도 세월의 일상은 묻어있다. 아버지의 냄새, 어머니의 손 때. 이것 없이 어찌 우리가 있을까. 그 일상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존한다. 처음과 나중이 하나인 것이다.
성경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다. 난 여기서 일상을 본다. 우리의 일상 속에 믿음도, 실상도, 하늘의 증거도 있다. 그것이 일상을 떠난다면 허구요, 들 뜬 부흥사의 한 낱 제스처에 불과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가‘헤라클레이토스’는『만물에 대하여』라는 책에 이런 글을 썼다.“잠자는 사람까지도 일한다. 그리고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에 참여한다.”그렇다. 나락 한 알 속에도 우주가 들어있고, 아이의 웃음소리에도 우주가 진동한다. 사람의 일상은 정직하다. 사람살이가 있는 한, 일상의 정직은 떠나지 않는다.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는‘일상의 신학’을 말하고 있다.
“일하는 것, 걷는 것, 앉는 것, 보는 것, 웃는 것, 먹는 것, 자는 것의 모든 일상에 신神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그의 말대로 작은 것은 큰 것의 약속이요, 시간은 영원의 생성生成이다. 사람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곧 신에 관해 말함이요, 신에 관해 말한다 함은 역시 사람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꽃이 열리니 신비도 열리고, 생명도 열리고, 우주도 열린다. 꽃잎 하나 피어나니 벌도 나비도 춤춘다. 사람도 대지도 꽃을 통해 웃는다더니, 그렇게 생명은 맞닿아 있다.
일상과 영원은 하나다. 일상의 노래는 그 영원을 노래하는 것이다.
내 부르는 노래가 땅에서도 들렸다면 하늘에서도 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노래는 일상처럼 정직해야만 한다. 라너의 말대로 꿀도 타지 않고, 미화하지도 않은 채 우리의 일상을 노래해야 하리라.
나는 미술대학 3학년 때 학교에서 열렸던 예술제 무대에서 해프닝을 한 적이 있다. 해프닝의 제목은‘이용하는 것과 이용당하는 것’. 그 때만해도 해프닝이나 퍼포먼스에 대한 이해도, 볼거리도 별로 없었으니 용기만 가지고 덤볐다.
학교 서무실에 있던 복사기를 어렵사리 빌려 대학극장에 옮겨 놓았다. 서무실에 하나밖에 없는 복사기라 업무마비가 된다고, 학생이 무얼 한다고 그러느냐고, 딱딱한 표정의 서무과장과 오후 내내 실랑이를 벌였다. 난생 처음 해보는 해프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무대 한편에 복사기를 켜놓고, 난 내 손과 얼굴을 마구 찍어댔다. 그러곤 수도 없이 찍은 그것을 미리 쳐 놓은 낚시 줄에 매달아 깜깜한 무대에서 불을 질렀다.
문화의 홍수 속에서 스스로 빠져 나오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그 당시 학교 앞에는 한 집 건너‘복사집’이였다. 그저 두 평 남짓만 되면 가게를 차릴 수 있는 용이함도 그랬지만, 리포트도, 노트정리도, 비싼 책도 모두 복사기가 대신하는 시대였으니 그것은 있는 집 냉장고 속처럼 흔했다. 매일 아침, 등교 길에 늘어져 있는 광경들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복사를 하려 줄을 선 학생들이 오히려 기계에서 찍혀 나오는 복사품 같이 보였다. 정말 그랬다. 스윽 스윽 소리를 내며 밀려나오는 복사기의 음산함은 멈출 수도, 거부하기도 어려운 복사 문화의 상징이었다.
요즘 신문에 나오는 표절시비는 예상사가 되었다. 아무도 그것을 보고 아파하거나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남의 것을 몰래 베껴먹어 돈을 번다면 그 속은 편할까. 일본의 것을, 유럽의 것을, 미국의 것을, 중국의 것을, 세상의 어느 것을 보지 않고 살수는 없다. 그러나 몰래 베껴 그것으로 배부르게 된다면 훗날 제 살아온 것을 돌아보게 될 때, 그 때 떳떳할 수 있을까. 명쾌히 밝힌다면 이런 학문이나, 음악이나, 영화나, 연극이나, 만화나, 문학이나 다른 방면에서도 도대체 이 땅에 얼마나 많으랴.
한 번은 TV에서 일본의 광고와 그것을 베낀 한국의 광고를 동시에 틀어준 적이 있다.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처음부터 다였다. 일본이 이것을 모르랴. 미국이 모르랴. 세상의 나라들이 이 짓을 진정 모르랴. 잠깐 가정을 해보자. 그 나라들이 한꺼번에 저작권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한다면 누가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작가도, 가수도, 기획사도, 방송국도, 정치인도 혼자만은 아니 될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도 힘들다. 그런 때가 온다면 우리는 낭패를 당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가슴이 답답해 온다. 가만히 지켜보는 그 나라의 눈들이 따갑다. 제발 이 생각이 비약이길.
한 나라의 문화가 어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겠는가.‘일상’이 모여 ‘살이’가 되고 그것이 배어‘문화’가 되는 것 아닌가.‘거짓’이 배이면 망한다. 사람이 죽는다.
내가 보았던 어느 외국가수의 뮤직비디오에는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문화를 경고하고 풍자한 것들이 여럿 있었다. 그 중서도 끔직한 비디오 하나를 굳이 소개하자면. 무표정한 얼굴에(온통 흰색으로 분장을 시켜 개성말살을 상징했다.) 학생들이 제복을 입고 줄을 서 어떤 공장 기계 속으로 행진한다. 반항도, 명분도, 의미도 없다. 기계 속으로 차례차례 몸을 던지고, 똑같은 음식이 되어 나오는 잔인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 아닌가. 창조와 개성과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함이 아니라, 제도와 실적과 결과에 준한 교육,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이것을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서 아무리 변명한다고 해도 나는 설득 당하지 않으련다.
다른 이의 것을 배우는 것이 어찌 다 쓸데없는 일이랴. 글씨를 배울 때도 훌륭한 대가들의 글을 임서臨書한다. 어떤 화실 선생은 르느와르나 밀레, 마티스, 피카소 같은 대가들의 그림을 놓고, 그대로 그리도록 공부시킨다. 한 번의 흉내로 많은 것은 배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것을 만들려 하는 훈련 속에 있는 행위다.
해외뉴스에선 양을 복제했다고 떠들고 있다. 쥐도, 원숭이도 성공했다고 난리다. 한편에선 사람이 복제되는 세상이 오면 어떻게 되느냐고 걱정들을 하고 있다. 대학시절 내가 보았던 복사가게 장면이 떠오른다. 당신의 형상을 그대로 만드셨던 신의 솜씨를 사람이 어찌 헤아리겠는가. 목숨보다 귀한 아들도 기꺼이 내어 줄 사랑이 창조를 낳은 것. 침묵으로 일상을 다스리는, 그 사랑이 아니라면 어려운 일.
어린아이들의 그림과 글이 좋은 것은, 기발해서가 아니다. 제 숨으로 제 세상을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물과 같이 맑아, 못난 속이라도 볼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사람들이 남의 것을 가지고 거들먹거리지는 않으리라.
이집트 룩소르지방 구르나 마을전체를 흙벽돌이라는 전통축조술로 만들려고 했던 건축가 화싼화티는 권력과 관념에 부딪치어 그 공사에 완공을 보지 못했다. 몇십년 전, 이 땅에서 시작되었던 새마을운동은 시멘트와 페인트로 온 마을의 흙과 자연을 덮어버렸다. 우리의 숨과 혼을 천한 문명으로 포장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회문화에 묘한 구석이 하나 있다. 대형교회에서 무엇을 하나 성공시키면 그것이 자신의 교회에 적절하든 그렇지 않든 거의 무조건 도입시키고 본다. 명분이 아니라 홍보에 집착한다. 서울에서 시작하면 제주도 울릉도까지 똑같다. 아니, 한국에서 시작하면 외국에 교포 한인교회도 똑같다. 무서우리만큼 한순간에 퍼지는 복사문화다. 그 곳에 가면 그 곳의 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의 숨을 제 숨처럼 쉬는 값싼 복사문화가 가득 깔려있다.
교회는 생색을 내어서 교회가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그 존재가 사랑이어야 한다. 절로 흐르는 노래가 하늘을 그림그려야 한다. 나무가 그늘을 만들 때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가만히 있음으로 만든다. 가만히 있다는 것은 성실을 넘어 있다. 시간과 계절을 견디어 둥근 나이를 먹는 나무는 존재 스스로 침묵과 손잡고 그늘을 만든다.
외국의 것과 대형교회의 것을 그대로 베낀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제 숨에 맞는 걸음을 걸어야 한다. 내 숨을 쉬는 것이 남의 길을 내어 주는 것이다.
기독교문화와 노래의 발전은 테크놀러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 시대를 타는 계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넘어 있는 하늘의 향에 있다. 수직과 수평을 나누어 마치 경건한 노래가 따로 있는 것처럼 나누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향한다는, 우주를 바라보는 연민의 정에 있는 것이다.
중국의 노신은“혈관에서 피가 나오고 분수에서 물이 나온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일상이 묻어 있어야 흥얼거려도 하늘의 노래가 되는 것이다. 혁명시 하나를 썼다고 해서 혁명문학가가 될 수는 없다. 혁명가로 살았다면 일기를 써도 혁명문학이다. 로드마크의 지적대로 양을 한 마리 그려놓았다고 해서 성화聖畵는 아니다. 예수라는 글자가 들어갔다고 해서 다 찬송가는 아니라는 말이다. 일상의 정직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숨이 들려야 남의 숨이 들린다. 제 숨도 모르고 남의 숨을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일상이 없이 역사는 없다. 일기없이 전기는 없다. 한국교회의 문화는 다시 제 숨을 들어야 한다. 비싼 음향기계가 좋은 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신이 노래를 만든다. 외국의 것이 교과서가 아니라 이 땅에 살았던 시간들이 교과서다. 하나님을 향한 노래는 사람을 향한 노래다. 이웃에게 한 일이 곧 하나님에게 한 것이니.
이 땅에 울리는 하나님의 숨소리가 그립다. 그 애닲은 마음이 애가요,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는 그 마음이 곧 하늘의 노래다.
어리석은 노래꾼 홍순관의 글 중에서.......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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