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작은 새 노래를 원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코츠커는 자기의 우울증을 극복할 수가 없어 괴로움을 겪었다. 그는 침묵이 최후의
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처지는 다음의 말을 그가 늘 간직하여 잊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
슬픔에 잠겨 있는 자에게는 세 가지 길이 열려 있다. 사다리의 첫 단에 서 있는 자는 운다. 보다 높은 단에
서 있는 자는 잠잠하다. 그러나 맨 윗단에 서 있는 자는 슬픔을 노래로 바꾼다.
이런 정신에서, 코츠커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라돔스크의 렙 슬로이모는 모세의 형 아론이 도달하였던 수준을
다윗 왕이 넘어섰다고 주장하였다.
사제 아론에 대해서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아론은 다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레위기 10:3). 그의 두 아들이
비참하게 죽자 그는 입을 다물어버린 것이다. 반면에 다윗 왕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내 영혼이 끊임없이
주를 찬미하라 하심이니, 야훼 나의 하느님, 이 고마우심을 노래에 담아 영원히 부르리이다"(시편 30:13).
렙 슬로이모의 이런 주장이 코츠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코츠커가 자신의 곤경에 대처하는
수단을 침묵보다 더 강한 어떤 것에서 찾으려 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그가 과연 그것을 찾아냈던가?
그때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곳곳에 슬픔이 깔려 있었다. 각자 자기의 슬픔을 등에 지고 다녔고 마지막 축복은
끝내 내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마음이 무거워지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넘쳤다. 그러나 코츠커 문하의
하시드들은 울지 않았다. "신도들[하시들]아, 승리 잔치 벌여라, 밤에도 손뼉치며 노래하여라"(시편 149:5). 렙
부남은 말했다. "하시드들은 쇠약해 졌을 때에도 노래를 부른다."
하시드의 노래란 하느님 찬양이다.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결혼 축가 같기도 하다. 결혼 잔치에서는 즐거워야
한다. 더구나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선물이 적합할까? 그것은 노래다. 왜냐하면 삶은 노래이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분은 좋은 노래 듣기를 원하신다.
막다른 곤경에 처했을 때 말, 곧 언어로써는 그 곤경에 대처할 수 없다. 차라리 노래가 보다 쉽게 곤경과
부딪칠 수 있게 한다. 노래는 단순히 음부(音符)를 반복하는 것도 아니고 기쁨이나 슬픔의 표현도 아니다.
노래는 전체의 삶을 완전한 경지에까지 끌어올리는 수단이다. 노래를 부름은 모든 말과 생각을 순수한
생각의 나라에까지 스스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라삐 아키바는] 생각 속으로 올라 갔다."
낡은 멜로디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 "하느님은 신기(新奇)를 사랑하신다"라고 렙
멘들은 말했다. 인간은 매 시간 새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의 제자, 렙 헤노크는 가시처럼 찌르는 이야기를 즐겨 했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은 흔히 웃음으로
끝내버렸다. 그러나 고스티닌의 렙 예키엘 메이예르는 "헤노크는 예루살렘의 함락을 울고 있는데 그들은
웃는다"고 말했다. 렙 헤노크가 침상에서 임종을 맞이 하는데 그의 친구 포리소프의 렙 아브롬이 찾아
왔다. 렙 헤노크는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1792년 러시아가 폴란드를 점령했을 때, 러시아 말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한 코작이 유다인
집주인에게 물었다. "당신이 '카쟈옌'[주인]인가?
유다인이 그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지. 그의 아내가 말을 잘못 통역하였다. "당신 악사['하잔']요? 나를 위해 한 곡 연주하시오."
그래서 유다인은 "성전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코작이 흥분하여 사정없이 그를 때렸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다급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분명히 그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가봐요. 그는 다른 노래를
원해요, 새 노래를!"
이 말과 함께 헤노크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헤노크는 코작이, 말하자면 하느님이, 화가 나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였던가? 이 이야기는
그가 하느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시인하는 것이었을까? 코작이 듣고자 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힘이 순전히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일까?
코츠커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 결코 놀이가 아니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파멸시키는 힘으로써" 실천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전능하신 분께서는 우리가 낡고 퇴색한
가락으로 당신을 예배하는 것이 못마땅하셔서 이 세계를 진노의 채찍으로 치시는지도 모를 일다. 그렇다면
렙 멘들은 새 노래, 새 오솔길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그것을 못 찾고 만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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