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몰락한 대우그룹의 알짜배기 계열사 대우종합기계가 매물로 나왔을 때의 일이다. 그 무렵 대우종합기계의 시가총액은 1조1756억원.이 가운데 자산관리공사와 산업은행 등이 보유하고 있던 57% 지분, 6700억원어치가 매물로 나왔다. 대우종합기계 노동조합은 우리사주조합을 통해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이 회사는 두산그룹에 넘어가 두산인프라코어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우종합기계 노조는 회사 자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차입을 해서 지분을 인수하고 10년 동안 받게 될 상여금 등으로 나눠 갚겠다는 계획을 제출했으나 자산관리공사는 입찰 의향서조차 내주지 않았다. 차입형 기업인수, LBO는 일반화된 인수합병 방법이다. 정부는 출처불명의 투기자본에게 차입형 기업인수를 허용했지만 노동자들의 요구는 거절했다. 그때 우연히 읽었던 책이 1991년에 번역 출간된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였다.
그때 나는 한 잡지에 실린 이 책의 서평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노동자의 기업 인수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의미있는 시도”라며 “대우종합기계 노동자들은 좀 더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고, “당신들은 지금 역사를 바꾸고 있다”고 썼다. 그 서평을 읽고 대우종합기계의 한 직원이 메일을 보내왔다. “그 글을 직원들과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읽고 힘을 냈다”고. 그러나 대우종합기계 노동자들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2008년 여름 쌍용건설 노조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 이 책을 다시 떠올렸다. 이 회사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넘기면서 공적자금을 수혈 받고 지분 50.1%가 자산관리공사 등 채권단에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다행히 우리사주조합이 15.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채권단 지분 가운데 24.7%를 추가 매입할 권리도 확보하고 있었다. 노조는 사모펀드 H&Q와 손잡고 채권단 지분을 인수, 노동자 지주회사로 간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때 만났던 노조 관계자의 이야기는 나름 충격적이었다. 그는 “노동자 지주회사? 말은 좋긴 한데 왜 노동자들이 회사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너무 가혹하다”고도 했다. 이들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체불 임금을 주식으로 전환 받았다. “주가가 올라서 결과적으로 다행이긴 하지만 과연 이런 희생을 감수하면서 노동자들이 지분을 확보하고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최선인지는 의문”이라는 이야기였다.
쌍용건설 채권단은 동국제강을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했는데 주가가 뛰어오르면서 매각이 무산됐다. 자산관리공사는 최근 쌍용건설 매각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 여전히 우리사주조합이 핵심 변수다. 이 회사를 인수하려는 쪽에서는 과반수 지분을 확보하지 못하면 경영권에 제약을 받기 때문에 우리사주조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쌍용건설은 노동자 지주회사가 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췄지만 현실적인 여러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 책, ‘몬드라곤에서 배우자’ 출간 20주년에 맞춰 ‘몬드라곤의 기적’이라는 책이 나왔다. 몬드라곤은 노동자생산협동조합이라는 독특한 지배구조를 갖고 있는 기업집단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260개 협동조합에 8만4천명이 일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3만5천명이 출자금을 낸 조합원이다. 조합원들은 똑같이 1표씩 의결권을 행사한다. 매출은 우리 돈으로 22조3820억원, 당기순이익은 2840억원, 스페인에서 9번째로 큰 기업집단이다.
몬드라곤 그룹은 주주가 아니라 조합원들이 이익을 공유하고 이익의 상당 부분을 다시 투자한다. 미래의 조합원들을 위해 당장 챙길 수 있는 이익을 양보하는 셈이다. 돈을 잘 벌거나 못 벌거나 모든 협동조합의 임금이 평준화돼 있고 한 협동조합에서 구조조정을 당하면 다른 협동조합에서 받아주거나 급여의 90%에 이르는 실업수당을 주고 직업훈련을 시킨다. 이익이 아니라 고용을 최고의 가치가 삼는, 노동자가 주인인 회사라서 가능한 시스템이다.
몬드라곤에서는 모든 노동자(조합원)가 동등한 1인 1표의 권리를 행사한다. 조합원들은 1인당 평균 1억9천만원 정도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퇴직할 때 돌려받게 된다. 몬드라곤의 노동자들은 모두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적용받는데 평균 연봉은 5300만원 정도. 조합원들은 추가로 출자금에 대한 이자와 배당을 받게 된다. 조합원은 전체 노동자의 40% 수준, 3만5천명 정도다. 연말 배당은 평균 1400만원 정도다.
몬드라곤 그룹은 스페인 내전 직후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 아리에타 신부가 1956년에 설립한 석유난로 공장 울고에서 출발했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모든 조합원들이 이사회에서 동등한 1표를 행사하는 독특한 지배 구조의 기업이었다. 다른 기업들이 이익을 늘리기 위해 노동자를 해고하지만 몬드라곤에서는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벌이고 새로운 공장을 짓는다. 애초에 수단과 목적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몬드라곤 그룹의 협동조합들은 이익과 손실을 100% 공유한다. 돈을 잘 버는 회사가 못 버는 회사를 지원하고 공동으로 연구·개발투자 비용을 부담해 공동의 성장전략을 모색한다. 협동조합은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올 수 없기 때문에 신생 협동조합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노동인민금고가 설립됐고 정부 차원의 사회보장제도 혜택을 받지 못하는 조합원을 위해 사회보장협동조합 라군아로도 설립됐다.
1965년에는 독자적인 기술 확보를 위해 공업기술연구협동조합 이켈란이 설립됐다. 이켈란은 협동조합 출자금과 정부 지원금으로 운영되는데 연구 성과는 회원으로 참여한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일반 기업들에도 공유된다. 조합원들에게 생활필수품을 싸게 공급하는 생활협동조합 에로스키와 기술전문학교 알레코프와 몬드라곤대학 등도 몬드라곤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공동의 경영진으로 협동조합을 묶는 것은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의무가 균형을 이루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협동조합 그룹의 경영진은 협동조합 간에 조합원들을 이동시키고 새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신규 고용을 창출함으로써 고용을 유지하는 책임을 진다. 노동인민금고는 이러한 가치와 원칙을 위반하는 협동조합과 연합 협정을 취소할 수 있는데 이는 몬드라곤을 협동조합의 느슨한 연합이 아니라 협동조합 복합체로 만드는 본질적인 요소다.”
1980년 스페인이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겪었을 때의 경험을 돌아보면 몬드라곤 모델의 경쟁력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몬드라곤 공동체 역시 전반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했지만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편성해 재고 부담을 줄이고 조합원들이 임금의 일부를 공제하는 형태로 추가 출자를 하는 데 합의해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다. 임금 인상률을 적정 수준으로 낮추는 데도 조합평의회의 동의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처럼 노동자의 천국 같은 몬드라곤에서도 1974년 파업이 있었다. 급여체계와 직무평가에 대한 반발이 1차적인 원인이었지만 공동소유·1인1표 지배구조에서도 경영진과 노동자 사이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당초 기대했던 것과 달리 노동자의 경영 참여는 형식적인 수준에 그쳤고 생산성과 노동조건 개선이 상충하는 경우도 많았다. 노동자들이 주인인 몬드라곤에 노동조합이 없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우리는 이상의 땅이 아닌 (계급투쟁이라는) 현실의 땅에 서야 한다.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지배를 타파하는 동력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자 계급이 대항해 싸워야만 하는 법률에 협동조합이 묶여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관리인이자 추진력인 국가의 역할 못지않게 그 국가를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동력으로서 노동자 계급의 역할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1974년 파업 성명 가운데)
노동조합 역할을 하는 조합평의회는 아무런 실질적 권한도 없이 경영진의 결정에 동의만 해주는 기관이라는 비난을 받는가 하면 일부 대의원들은 경영진의 계획에 반대하는 것이 조합평의회 설립 목적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경영진에 도전하기를 꺼리는 경우도 있었다. 조합평의회는 경영의 도구가 되지 않으면서 경영진과 협력, 소유자의 이익과 노동자의 이익이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덩치가 커지면서 나타나는 문제들도 있다. 조합원과 비조합원들 사이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조합원들의 경영 참여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도 걱정거리다. 해외 진출을 할 경우에도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적용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협동조합의 정신을 잊고 조합원 이기주의로 흐르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협동조합이거나 협동조합으로 전환할 기업과만 거래를 한다는 원칙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김성오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연구원은 이 책에서 “몬드라곤이 끝까지 놓치지 않는 것은 협동조합의 정신과 원칙, 구체적으로는 연대”라고 강조한다. 몬드라곤은 노동자의 생산 수단 소유가 유토피아적 망상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세계경제와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와 주주자본주의 카니발리제이션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는 이때 몬드라곤은 우리에게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아리스멘디 신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은 협동조합주의자로 태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협동조합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성숙과 사회생활을 통한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협동조합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본능을 억제하고 협동이라는 원칙에 적응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교육과 선행의 실천을 통해서 사람들은 협동조합주의자가 될 수 있다.”
몬드라곤 그룹은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현대자동차 정도 규모의 기업집단이다. 임금 수준은 현대자동차가 높지만 적어도 몬드라곤에는 비정규직이 없고 노동자들의 임금 격차도 크지 않다. 노동자 소유 기업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 연구원은 “노동자들의 집단 양심은 일종의 사회화된 의식”이며 “몬드라곤의 노동자 조합원들이 보여준 태도는 그들이 특별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집단 양심에 따라 움직이는 노동자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1991년 유나이티드항공은 직원들을 자르느냐 임금을 깎느냐의 갈림길에서 두 번째를 선택했다. 임금을 깎고 일을 늘리는 대신, 고용을 안정시키고 줄어든 임금만큼 주식을 사서 보상해주기로 했다. 임금이 많게는 15.7%까지 깎였지만 회사는 현금과 차입을 동원해 주식을 사서 나눠줬고 그 결과 전체 주식의 55.0%를 직원들이 소유하게 됐다. 임금은 깎였지만 고용은 유지됐고 다행히 주가도 크게 뛰어 올라 직원들은 엄청난 평가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만약 발상을 전환해서 대우종합기계 노동자들에게 은행 대출을 허락했다면 지금 이 회사는 어떻게 됐을까. 노동자들이 기업을 소유한다고 해서 임금을 마구 끌어올린다든가 경영이 엉망이 된다든가 하지는 않는다. 기업의 이익을 주주들이 가져가느냐 노동자들과 미래의 노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노동자들의 기업 인수를 지원하는 대안 금융기관을 설립하는 것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쌍용건설과 몬드라곤의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주식회사 형태의 노동자 소유 기업에서는 주주와 노동자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주식회사에서는 기업의 이익이 기업 외부의 주주들에게 빠져나가지만 몬드라곤에서는 그 이익이 고스란이 기업 안에 남아 다시 투자된다. 주주인 노동자가 감수해야 할 주가 등락의 위험부담이 몬드라곤 조합원들에게는 없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주식회사 그 자체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몬드라곤의 기적 / 김성오 지음 / 역사비평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