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나벤투라 영성에 관한 내용
2019년 2월10일(일) 맛세오 월례회 가기 전 아침
교회의 위계에 대한 개념이 권위의 개념으로 오인되어 인식된다는 점이다. [프란치스코와 보나벤투라]라는 책을 선물 받고 읽다가 의문이 될 내용에 대한 해답을 얻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옮기며 기록해두고자 한다. 일반 서적을 즐겨 읽다가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 영성 서적을 소홀하게 여긴 점을 반성하며 영성학교나 심포지움에서 배운 보나벤투라 영성을 통해 내면화의 성숙을 기대해본다. 다음에 인용해본다.
보나벤투라가 위계질서에 대해 언급할 때, 그의 첫 관심사는 개별인간 안에 담긴 영성적 단계에 있다. 각 사람은 사고방식과 활동 안에서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성장하기 위해 도전한다는 점에서 ‘위계화’되도록 불림 받았다. 보나벤투라는 [육일간의 창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관상의 세 번 째 부분은 위계화된 인간의 정신을 숙고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항구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즐거움을 방사(放射)하는 별들 또는 별들의 빛을 통해 이해된다. 이 세 가지를 향유할 때,영혼은 위계화된다.(H 20.22) H: 육일간의 창조에 관한 학술강연집(Collationes in Hexaemeron)
위계는 권력 구조의 언어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나 영성의 언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위계는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상태와 관련된 것이다. 한 개인은 그가 어떤 특정한 영성적인 자질을 보일 때‘위계화’되고, 교회는 이러한 자질들이 발현되고 융성할 때 위계화된다.
이러한 자질들은 어떠한 것들인가? 보나벤투라의 이해에 따르면, 위계화된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항구하게, 아름답게, 그리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다. 항구함은 기도와 관상의 핵심이라는 관점에서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주의를 기울이고, 충실하며, 특히 진실한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아름다움은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지혜의 습득을 통해 기도 안에서 성장하는 아름다움이다. 즐거움은 하느님에게 부름을 받았고 그분의 권능으로 고양되었다는 인식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봉사하는 열정적인 삶을 통해 그 자신을 표현하는 즐거움이다.
교회는 본성상 위계적이다. 이것은 교회가 그 계급구조에서 지배계층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은 교회 안에서 위계화되도록 요구받는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교회의 위계질서는 부동의 현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도전이다. 위계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권력과 지배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위계적 권력을 요구하는 교회 내 어떤 단체도 권위라는 이름으로 발언할 때는 그 발언들이 항구함, 아름다움, 즐거움으로 물들어있을 때만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이를 유지했을 때 공동체의 삶에서도 이와 같은 태도들이 성장하도록 촉진할 수 있다. 위계로서의 교회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프란치스코의 삶처럼 항구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삶의 증거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 고양을 살고자 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 대한 도전이다.
항구하다는 것에 그 반대로 가게 되는 상태를 비유한 흥미로운 표현을 또 옮겨본다.
사실, 계시의 포도주에 약간의 철학의 물을 섞는 것은 포도주를 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최악의 기적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다고 읽지, 그 반대로 읽지 않는다(H 19.14)
신앙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 개념은 이성의 분석 대상이 될 수 있다. 인간 이성의 자기 충족을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이러한 해방을 유발한다. 신학과 종교적 전통이 아니라, 철학이 새로운 세계를 위한 의제로 설정된다.
보나벤투라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학자들에 포함된다. 그에게 있어 대학 학문에서 철학을 신학에서 분리하는 것은 인간 이성의 위대함, 즉 신학의 주제인 신적 계시의 영향을 빼앗는 것이었다. 보나벤투라는 인간 삶의 성찰은 오직 인간 운명의 시초이자 성취로서의 하느님과의 연관성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 사유하는 것은 그것의 본질적인 활기,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활기에서 생명을 빼앗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보나벤투라는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주에 있는 오르비에토 인근의 반뇨레지오에서 피단자의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1217년경 태어났다. 나중에 파리의 대 학자로 신학부의 저명한 교수 헤일스의 알렉산더가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어 신학부 학장직도 프란치스코회로 옮겨간 것이 계기가 되어 프란치스코에게 영감을 받았다. 프란치스코의 하느님체험에 대한 초월적 체험에 매료되어 프란치스코가 세운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작은형제회 총장까지 지내게 되었다. 하느님의 진리가 인간 사유를 결정짓는 것이지 인간 사유가 하느님의 진리를 결정짓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철학자가 아닌 시인이요 신비가요 성인이었던 한 사람 ,프란치스코의 삶으로 크게 동요된 신학자이다.
이전에 꺼리던 삶의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사랑하도록 변화되는 나병환자를 끌어안는 체험은 너무나 유명한 핵심 사건이다. 그것을 행함으로서 참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삶의 방향을 정하는 자유, 철저한 가난을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게 하였다. 그는 빼루지아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가 감옥에서 깊은 사유를 한 것이다. 전쟁과 갈등 안에서의 성공에 기뻐하지 않고 모든 이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연민에 다다르고, 평화와 선의의 기쁜 소식의 전달자가 되는 것에 기뻐하였다. 이러한 자유는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창조된 모든 세상을 껴안고 경외하도록 이끌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새로운 빛 안에서, 헌신과 감사하는 기쁨의 정신 안에서 사랑하는 이와 관련된 빛 안에서 사랑하는 분이신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것을 보았고, 그래서 세상의 실재들 안에서 감사하고 경외하며 기뻐하도록 성장하였다.
오늘날 프란치스코는 세상에 대한 이러한 연민으로 생태계의 주보성인으로 공경받는다. 1226년 죽음을 앞두고 “자매 죽음이여, 어서 오십시오”
하느님은 성화가로서 무엇보다 먼저 창조 안에 특정한 양식 배치를 조정 또는 사용하는 분으로 말한다. 그리고 예술가가 다른 이들이 그 또한 그녀의 작품의 특성을 알아보길 바라며 그렇게 하도록 다른 이들을 부르고 격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세계를 이해하고 인식하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분이다. 보나벤투라는 성화기인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인식이 커질수록 그 과정에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인간 삶의 목적과 의미를 더욱 충만히 이해할 수 있는 영감을 얻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조정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하느님의 모상은 인식을 추구하는 우리와 합심하여 일하는 하느님의 한 부분이다.
인간은 감각을 통하여 주위를 둘러싼 세계를 인식한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통해, 또한 우리의 감각과 사고력을 통해 얻은 인식을 ‘창조된 인식’이라고 보나벤투라는 부른다. 철학자로서 후자의 측면에서 인간 인식은 우리가 어떠한 경헙에 대해 사유하거나 숙고할 때 감각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활용한다.
하지만, 보나벤투라는 우리 인간 인식에는 감각 경험을 통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음을 주장한다. 감각을 통한 경험은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치는 그 자체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질 때는 발견되지 않는다. 감각 경험의 참된 가치는 그것이 우리 감각이 제공할 수 있는 제한된 전망보다 더 많이 고취되고 고양된 우리의 경험 세계에 대한 전망과 인식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된다는 사실에 있다. 감각을 통해 경험 된 것은 완전히 인식되지만,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경험은 우리가 지금까지 상상할 수 있던 것보다 더 큰 삶의 전망으로 우리를 안내하기 위한 것이다.
포도주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맛을 처음 시음한 경험은 참된 인식이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초기 경험은 잘만 하면 최고 일류 포도주를 알아보는 포도주 전문가가 되도록 안내할 것이다. 이는 포도주를 처음 맛보면서 상상할 수 없던 기쁨을 체험하게 됨으로써 포도주에 대한 이러한 후자의 인식을 얻게 되는 순간을 말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첫맛을 인식할 때, 단순히 거기에 만족하여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의 원천이 될 삶의 전망, 우리가 음미한 것에 대한 점점 더해가는 인식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프란치스코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기쁨이다.
세계라는 한 권의 책을 읽게 되면, 이 책은 독자를 하느님에게 이끌어 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보나벤투라는 인간의 자만심과 이기심이 이 세상에 어둠을 초래하여 이 책을 읽지 못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하느님의 계시에 반사적으로, 그리고 주의 깊은 귀 기울임을 통하여, 하느님이 우리를 비추시도록 허락할 때만 그 빛에 의해 다시 창조의 책을 읽을 수 있다.
인간이 타락하였을 때, 세계라는 이 책은 생명력을 잃고 지워진 상태가 되었다. 이 책을 밝혀줄 또 다른 책이 존재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이러한 책은 세계라는 책에 기록된 것들의 상징성을 알려주는 성경이다.(H 13.12-13)
주의 깊은 성경 읽기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밝혀줄 것이라고 설명한다. 주의 깊은 성경 독서는 우리의 감각 경험 또한 초월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고, 그 감각 경험은 우리에게 영적인 실재들에 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낼 것이다. 최소한 우리가 그것을 바랄 때 그러하다.
뱀처럼 슬기롭게 되어라(마태10,16)를 살펴보자. 보통 무서운 뱀조차 영적인 실재의 상징으로 쓰일 수 있다. 본질적인 것, 곧, 자신의 머리를 지키지 위하여 자기 몸의 다른 부분을 희생시키는 뱀의 의지에 대해 생각해보라.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인간적인 삶을 위한 마음의 영역, 사랑의 삶이라는 본질적인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 삶 안에서 비본질적인 것들을 기꺼이 내놓도록 요구받는다.
보나벤투라는 우리가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상징적인 사고방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세계는 보이는 것 그 이상이다. 세계를 관상하고 그 상징적 의미에 대해 깊이 숙고할 때, 우리는 마음의 가르침을 받게 되고 삶이 물질적인 요소 이상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창조된 인식’이라는 보나벤투라의 개념은 본성상 상징적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고 하느님 사랑의 현존의 항구한 상징으로써 우리와 마주한다. 이것이 성 프란치스코가 찾아낸 것이었다. ‘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의 영감에 의지하여 믿는 이들에게 사물의 표면 너머를 바라보고 생각하도록, 세계를 하느님의 창조적인 선의 반영으로 인식하도록 요청한다. 프란치스코와 마찬가지로 보나벤투라에게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신앙의 관상적인 눈으로 경이로이 바라볼 때, 하느님을 향한 길을 따라 우리를 이끌어주는 세계가 된다.
지혜로 번역될 수 있는 sapientia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지혜는 단순히 지적 훈련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인간 갈망의 개입, 특히 사랑에 대한 갈망을 통해 얻어지는 인식의 형태이다
세계가 신실한 관상의 정신 안에서 발견될 때만 일어난다. 관상적인 마음은 세계가 지닌 이러한 상징적 본성을 인식하는 능력, 내면을 바라보고 하느님 사랑의 반영을 마음 깊이 인식하는 능력 안에서 자라난다. 이것이 바로 보나벤투라에게 창조된 지혜의 습득이다.
일단 이러한 상태에 다다르게 되면, 인간은 사랑하는 이에게서 받은 선물의 깊은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새로워진 연인처럼 새롭게 형성된다. 그 순간은 선물에 대한 인식을 넘어 사랑하는 이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인식으로 옮겨가는 때이다. 인간 영혼이 창조된 지혜를 얻는 그 순간에 하느님의 현존 그 자체라는 선물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이때 하느님의 현존은 곧 창조되지 않은 지혜이다. 이 세계의 실재들을 하느님 사랑의 상징들로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나아갈 수 있게 자극되고 안내된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여정은 이 세상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이라는 원천으로 옮겨가기 위해서 참을성 있는 갈망으로 깨어 세상에 대한 경건한 관상 안에 잠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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