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간의 주부 안식년 보내기 / 김형태
저는 곧 쉰이 되는 주부입니다.
곧 20년 결혼 생활을 맞아 1년 계획으로 주부 안식년을 떠날 예정입니다. 처음에는 1년 동안 세계일주를 해볼까 계획했는데 그냥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게 왠지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을 그냥 허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정처 없이 집시처럼 세상을 돌아다닐 게 아니라 한두 군데 정착해서 무엇을 배워볼까 궁리하고 있습니다.
가령 중국에 가서 여러 가지 만두를 많이많이 먹어본 뒤 그 중 제일로 맛난 집 주방에 무보수로 취직을 하여 만두를 맛있게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요. 물론 주방장한테 국자로 들입다 얻어터질 각오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유럽으로 갓 맛있는 샌드위치를 신나게 먹어 보구 그 중의 한 가게에 헬퍼로 들어가 밑바닥부터 몇 달 간 배워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답니다. 1년 뒤 돌아와 세상에서 제일 작지만 맛있고 정성이 든 만두집이나 샌드위치 가게를 할 수 있다면 주부 안식년을 좀더 보람있게 보내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니면 과테말라에서 가서 1년 간 스페인어를 배우는 것도 심각하게 고민 중입니다
제가 이런 저런 몇 가지 길을 놓구 고민하는 건 안식년을 가진 뒤에 제 삶이 조금 더 역동적으로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만일 김형태님께 1년이라는 안식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보내고 싶으신지요?
RE ;
와아, 제게도 1년간의 안식년이 주어진다면 하는 상상을 하니까 가슴이 턱 막혀버리는 군요. 온갖 희망사항들이 번호표도 뽑지 않고 서로 나서겠다고 난리가 아닙니다.
제가 위의 빈 행간은, 제가 1년 간 하고 싶은 일을 수차례 썼다가 지운 자리입니다. 그만큼 참 소중한 시간인가 봅니다.
중국도 좋고, 과테말라도 좋습니다. 만두도 좋고 스페인어도 좋습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조언은, 그 시간을 한국에서 까먹지만 마시라는 것(한국이 뭐 나빠서가 아니라 50년 동안 살아봤으니까 자유롭게 주어진 1년은 다른 데서 살아봐야지요?. 그리고 너무 보람되고 가치 있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1년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보내야 한다고 너무 강박을 가지면 하루하루가 안타까워서 오히려 진정한 안식이 되지 못하고 조바심으로 가득 찬 시간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무엇을 배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습니다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긴밀한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결혼 2o년 동안 철저히 유보되었던 개인적인 시간과, 잃어버렸던 내면의 모습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시는 것은 어떨지요.
중국의 만두 가게에서 일을 하더라도, 빨리 배워서 한국에 가서 만두가게를 해야지 이런 생각보다, 중국의 만두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과거도 미래도 아닌 철저히 오늘의 내 자신에 대하여 많은 걸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1년 뒤의 일까지 미리 생각해서 의미 있게 보내려고 한다면 진정한 안식이 아니잖아요? 준비 작업이지, 차라리 앞으로 뭐 배워볼까, 무슨 일을 할까, 이 답을 구하기 위해 1년 간 나 자신을 찾는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면 더 자유로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라면, 1년 동안 아무런 목적도 없이 철저히 여행을 위한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그걸 무의미하다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무의미한 시간을 할당받아 본 적이 없잖아요? 그것도 1년 정도의 기간을 무의미하게 그냥 보내도 된다는 그런 시간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1년 간의 무의미한 여행에서 우리가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혹시 그런 불확정성이 두려운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무엇인가 배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따지고 보면 한 번도 완벽하게 맘 편히 쉬어본 적 없이 50년을 살아온 휴유증일 수도 있습니다.
일생에 단 한 번 1년쯤은 아무런 의미 없이 집시처럼 유랑하는 것도 저라면 흥미진진하겠군요. 삶에 대한 모든 강박을 다 벗어던지고, 몸은 외국을 탐험하고 마음은 나의 내면을 탐구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습니다. 그런 1년간의 휴식이라면 그 후로 내 자신의 그릇이 더 켜져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일은 그때 시작하겠습니다.
부러워요!! 나에게도 안식년을 달라!!(나도 50이 되면 달라고 해야지)
출처 : 너, 외롭구나 / 김형태의 청춘 카운슬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