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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도현님의 시 31편 ...

     

     

     

     

     

     

    우리가 눈발이라면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사랑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 짓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로 하여 그이가 눈물 짓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못 견딜 두려움으로
    스스로 가슴을 쥐어뜯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내가 쓰러져 죽는 날에도
    그이를 진정 사랑했었노라 말하지 않게 하소서
    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 하소서

     

     

     

     

    그대에게

    괴로움으로 하여
    그대는 울지 마라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니
    아무도 곁에 없는 겨울
    홀로 춥다고 떨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세상 속으로
    언젠가 한번은 가리라 했던
    마침내 한번은 가고야 말 길을
    우리 같이 가자
    모든 첫 만남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커서
    그대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있어
    이 겨울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가다 보면 어둠도 오고
    그대와 나
    그 때 쓰러질듯 피곤해지면
    우리가

    세상속을 흩날리며
    서로서로 어깨 끼고 내려오는
    저 수많은 눈발 중의 하나인 것을
    생각하자
    부끄러운 것은 가려주고
    더러운 것은 덮어주며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찬란한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한/ 두/ 사/람/이 되/자
    괴로움으로 하여 울지 않는
    사/랑/이/ 되/자



     

     

     

     


    그대에게 가고싶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으로 하나로 무잔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서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 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스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에게 가는 길

    그대가 한자락 강물로 내 마음을 적시는
    동안 끝없이 우는 밤으로 날을
    지새우던 나는 들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밤마다 울지 않으려고 괴로워하는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래오래 별을 바라본 것은 반짝이는 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어느 날 내가 별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헬 수 없는

    우리들의 아득한 거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지상의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길들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해 뜨는 아침부터 노을 지는 저녁까지 이 길 위로 사람들이

    쉬지 않고
    오가는 것은 그대에게 가는 길이 들녘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랍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은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오직 한 움큼만 덜 가졌다는 뜻이므로
    늘 가슴 한 쪽이 비어 있어
    거기에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므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갈등

    바람은 불지요,
    길을 열자고 같이 나섰던 동무들은
    얼음장 꺼지듯 가라앉아 소식 없지요
    그대 보고 싶은 마음 언덕배기에 빈 터에 쑥 돋듯 하지요,
    저 연록 물오른 바람 난 실버들 가지처럼
    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지요,
    나도 내 존재를 어쩌지 못해서요,
    이래서는 안돼, 안돼 하면서
    내 몸은 자꾸 꼬여가지요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겨울 엽서

    쫓겨난 교문 밖에서
    세 번째 겨울을 맞습니다
    그대의 하늘 쪽을 바라보는 동안
    이 엽서에 퍼담을 수 없을 만큼
    눈이 내렸습니다
    보고 싶다는 말만 쓰려고 했습니다
    눈 덮인 학교 운동장을
    맨 먼저 발자국 찍으며 걸어갈 아이를
    멀찍이 뒤에서 불러 보고 싶다는 말은
    정말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사랑이여
    그대와 나를 합하여
    우리라고 부르는 날이 다시 올 때까지는
    나는 봄도 기다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구월이 오면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그대를 위하여

    그대를 만난 엊그제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내 쓸쓸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울물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던 까닭은
    세상에 지은 죄가 많은 탓입니다.
    그렇지만 마음 속 죄는
    잊어버릴수록 멀어져 간다는 것을
    그대를 만나고 나서야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그대를 위하여
    내가 가진 것 중
    숨길 것은 영원히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하여
    아픈 가슴을 겪지 못한 사람은
    아픈 세상을 어루만질 수 없음을
    배웠기에 내 가진 부끄러움도 슬픔도
    그대를 위한 일이라면
    모두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대를 만나고부터
    그대가 나를 생각하는 그리움의 한 두 배쯤
    마음 속에 바람이 불고
    가슴이 아팠지만
    그대를 위하여
    내가 주어야할 것들을 생각하며
    나는 내내 행복하였습니다.


     





    누가 나에게 꽃이 되지 않겠느냐 묻는다면
    나는 선뜻 봉숭아꽃 되겠다 말하겠다

    꽃이 되려면 그러나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겠지
    꽃봉오리가 맺힐때까지
    처음에는 이파리부터 하나씩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밀어 보는 거야

    햇빛이 좋으면 햇빛을 끌어당기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흔들어보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도 오겠지
    그 밤에는 세상하고 꼭 어깨를 걸아야 해
    사랑은
    가슴이 시리도록 뜨거운 것이라고
    내가 나에게 자꿈 할해주는 거야

    그 어느 아침에 누군가
    아, 봉숭아꽃 피었네 하고 기뻐하면
    그이가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내 몸뚱어리 짓이겨 불러줄 것이다




     

     

    나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사철 나무가 버티는 것은
    귀뺨을 폭풍한테 얻어맞으면서
    이러 저리 머리채를 잡힌채 전전긍긍하면서도
    기어이, 버티는 것은
    이제 막 꼼지락꼼지락 잎을 내밀기 시작하는 어린 나무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대한 버티는게 나무의 교육관이다
    낮은 곳을 내려다볼 줄 아는 것,
    가는 데까지 가 보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온 몸으로 가르쳐주며
    나무는 버틴다

    나무라고 해서 왜 가지가지 신경통을 모르겠으며
    잎사귀마다 서러움으로 울컥일 때가 왜 없었겠는가
    죽어버릴 테야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 휘저어 보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트럭을 탄 벌목꾼들이 당도하기 전에
    그냥 푹, 고꾸라져도 좋을 것을
    죽은 듯이 쓰러져 이미 몸 한쪽이 썩어가고 있다는 듯이
    엎드려 있어도 될 것을 나무는
    한사코 서서, 나무는 버틴다
    체제에 맞서 제일 잘 버티는 놈이
    제일 먼저 눈밖에 나는 것,
    그리하여 나무는
    결국은 전생애를 톱날의 아구 같은 이빨에 맡기고 마는데,

    여기서 나무의 생은 끝장났다네,
    저도 별 수 없지, 하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끌려가면서도 나무는 버틴다
    버텼기 때문에 나무는 저를 싣고 가는 트럭보다 길다
    제재소에서 토목토막으로 잘리면서 나무는
    뎅구르르 나뒹굴며
    이제 신의주까지 기차를 나르는 버팀목이 될 거야, 한다
    나무는 버틴다


     





    내게 땅이 있다면
    거기에 나팔꽃을 심으리
    때가 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랏빛 나팔소리가
    내 귀를 즐겁게 하리
    하늘 속으로 덩굴이 애쓰며 손을 내미는 것도
    날마다 눈물 젖은 눈으로 바라보리
    내게 땅이 있다면
    내 아들에게는 한 평도 물려 주지 않으리
    다만 나팔꽃이 다 피었다 진 자리에
    동그랗게 맺힌 꽃씨를 모아
    아직 터지지 않은 세계를 주리


     


    바닷가 우체국

    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들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별을 쳐다보면
    가고 싶다
    어두워야 빛나는
    그별에
    셋방을 하나 얻고 싶다.

    - 그대에게 가고 싶다 中




    별빛

    그대여, 이제 그만 마음 아파해라


     

     


    분홍지우개


    분홍지우개로
    그대에게 쓴 편지를 지웁니다
    설레이다 써버린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나갑니다
    그래도 지운 자리에 다시 살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생각
    분홍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그리운 그 생각의 끝을
    없애려고 혼자 눈을 감아 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 같습니다


     

     



    사랑은 싸우는 것

    내가 이 밤에 강물처럼 몸을 뒤척이는 것은
    그대도 괴로워 잠을 못 이루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창 밖에는 윙윙 바람이 울고
    이 세상 어디에선가
    나와 같이 후회하고 있을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런 밤 어디쯤 어두운 골짜기에는
    첫사랑 같은 눈도
    한 겹 한 겹 내려 쌓이리라 믿으면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누우면
    그대의 말씀 하나하나가 내 비어 있는 가슴속에
    서늘한 눈이 되어 쌓입니다
    그대
    사랑은 이렇게
    싸우면서 시작되는 것인지요
    싸운다는 것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 벅찬 감동을 그 사람 말고는 나누어 줄 길이 없어
    오직 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인 것을
    사랑은 이렇게
    두 몸을 눈물 나도록 하나로 칭칭 묶어 세우기 위한
    끝도 모를 싸움인 것을
    이 밤에 깨우칩니다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인 것을


     



    사랑한다는 것

    길가에 민들레 한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면가고 싶지만

    섬에 가면
    섬을 볼 수가 없다
    지워지지 않으려고
    바다를 꽉 붙잡고는
    섬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수평선 밖으로
    밀어내느라 안간힘 쓰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한 며칠, 하면서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혼자서 훌쩍, 하면서

    섬에 한번 가봐라, 그 곳에
    파도 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봐라

    삶이란 게 뭔가
    삶이란 게 뭔가
    너는 밤새도록 뜬눈 밝혀야 하리


     


    소금 인형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안개 속에 숨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연애

    연애 시절
    그때가 좋았는가
    들녘에서도 바닷가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있던 시절
    사시사철 바라보는 곳마다 진달래 붉게 피고
    비가 왔다 하면 억수비
    눈이 내렸다 하면 폭설
    오도가도 못하고, 가만 있지는 더욱 못하고
    길거리에서 찻집에서 자취방에서
    쓸쓸하고 높던 연애
    그때가 좋았는가
    연애 시절아, 너를 부르다가
    나는 등짝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다
    무릇 연애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문득 문득 사람이 사람을 벗어버리고
    아아, 어린 늑대가 되어 마음을 숨기고
    여우가 되어 꼬리를 숨기고
    바람 부는 곳에서 오랜 동안 흑흑 울고 싶은 것이기에
    연애 시절아, 그날은 가도
    두 사람은 남아 있다
    우리가 서로 주고 싶은 것이 많아서
    오늘도 밤하늘에는 별이 뜬다
    연애 시절아, 그것 봐라
    사랑은 쓰러진 그리움이 아니라
    시시각각 다가오는 증기기관차 아니냐
    그리하여 우리 살아 있을 동안
    삶이란 끝끝내 연애 아니냐


     


    연애편지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 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한 그리움이며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있나 없나 수없이 되읽어 보며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 속에서도 꿨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 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 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물방울로 만나 물방울의 말을 주고받는
    우리의 노래가 세상의 강을 더욱 깊어지게 하고
    세상의 여행에 지치면 쉽게
    한 몸으로 합쳐질 수 있었다
    사막을 만나거든
    함께 구름이 되어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한때 우리는
    강가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는 느티나무였다
    함께 저녁강에 발을 담근 채
    강 아래쪽에서 깊어져 가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오랜 시간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함께 기울고 함께 일어섰다
    번개도 우리를 갈라 놓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느티나무일 수 없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우리는 몸을 바꿔 늑대로 태어나
    늑대 부부가 되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늑대의 춤을 추었고
    달빛에 드리워진 우리 그림자는 하나였다
    사냥꾼의 총에 당신이 죽으면
    나는 생각만으로도 늑대의 몸을 버릴 수 있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이제 우리가 다시 몸을 바꿔 사람으로 태어나
    약속했던 대로 사랑을 하고
    전생의 내가 당신이었으며
    당신의 전생은 또 나였음을 별들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당신은 왜 나를 버렸는가
    어떤 번개가 당신의 눈을 멀게 했는가
    이제 우리는 다시 물방울로 만날 수 없다
    물가의 느티나무일 수 없고
    늑대의 춤을 출 수 없다
    별들의 약속을 당신이 저버렸기에
    그리하여 별들이 당신을 저 버렸기에


     

     



    우물

    고여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 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뿐
    외눈박이 물고기 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저물 무렵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 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 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 애와 내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애는 날이 갈 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번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
    그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 몇살 열 몇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만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일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것도 같습니다



    준다는 것

    이 지상에서 우리가 가진 것이
    빈 손밖에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서로 바라보는 동안은
    나 무엇 하나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대 손등 위에 처음으로
    떨리는 내 손을 포개어 얹은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스스럼없이 준다는 것
    그것은
    빼앗는 것보다 괴롭고 힘든 일입니다

    이 지상에서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
    그것은
    세상 전체를 소유하는 것보다
    부끄럽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대여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줄 것이 없어
    마음 아파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누구에게 준
    넉넉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안도현 시 모음 ...matiinata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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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마티나타11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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