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노점 철거 3년…빚에 목맨 ‘절망의 겨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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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모씨(48)는 2004년 여름 목을 맸다. 1984년부터 청계천에서 ‘넝마(중고옷)’를 팔던 김씨는 풍족하진 않아도 애들을 키우며 그럭저럭 먹고 살 만했다. 그러던 중 서울시가 노점상들을 모두 동대문으로 보냈다. 청계천 개발 때문이다. 김씨는 동대문에서도 넝마를 팔았다. 하지만 장사는 청계천처럼 잘 되진 않았다. ‘두타’니 ‘밀리오레’니, 화려한 대형 의류 상점이 즐비한 동대문. 누구도 김씨의 넝마를 사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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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가족을 위해 일수를 빌려 썼다. 처음에 1백만원으로 시작한 돈은 이자가 1%, 2% 늘어나더니 결국 김씨의 목을 죄었다. 김씨는 자기 가게에서 목을 맸다. 그의 유서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이명박 시장님, 나는 이렇게 죽습니다만 시장님이 하는 일, 남은 이 사람들(청계천 상인들)이 살 수 있게는 꼭 좀 만들어 주고 하십쇼.”
청계천 노점상들이 일터를 잃은 지 벌써 3년. 이들 중 일부는 동대문으로, 나머지 일부는 서울 동묘공원으로 판을 옮겼다. 몇은 빌려 쓴 일수돈으로 신음했고, 그 때문에 목숨을 버린 김씨 같은 이도 있었다.
서울 동대문운동장 풍물시장에서 옷을 팔고 있는 강모씨(50)는 얼마전 머리를 크게 다쳤다. 고물을 팔고 있던 옆 노점상 이모씨(50)와 다투다 이씨가 집어던진 작은 항아리에 머리를 맞았다. 강씨와 이씨가 싸운 이유는 ‘좌판 앞 30㎝’ 때문이었다. 풍물시장에서는 좌판 앞뒤로 30㎝까지만 물건을 내놓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요즘은 장사가 안 돼 물건을 통로까지 내놓는 사람들이 많다. 이 때문에 시장에선 1주일에 한두번씩 싸움이 벌어진다.
풍물시장은 청계천에서 노점을 하던 상인들이 옮겨온 곳. 청계천에선 이렇게까지 각박하진 않았다. 풍물시장에 들어오면서 인심까지 나빠졌다. 같은 종류의 물건을 걸기만 해도 가시 돋친 말이 나오고 가끔은 주먹다짐으로 이어진다.
풍물시장에서 골동품과 구제품을 파는 주길용씨(49)도 속이 까맣게 타 있다. 주씨는 요즘 장사보다는 주변 상인들과 막걸리 마시는 시간이 더 많다. “어차피 팔리지도 않아. 훔쳐가는 사람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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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천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임시로 둥지를 튼 동대문운동장 내 풍물시장. 예전 청계천때 같은 북적거리는 시장의 활력 대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한 시장에서 한 상인이 담배를 피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남호진기자 |
주씨는 술 대신 밥을 끊었다. 막걸리는 밥값의 절반. 그 막걸리로 끼니도 때우고 몸도 데운다. 장한평의 1평짜리 방값은 7개월치가 밀렸다. 밀린 일수돈은 일용직 노동을 하며 갚고 있다. 지난 5월에 치른 아버지 장례 부조금도 일수빚을 갚는 데 썼다. 주씨는 “노친네 죽은 덕분에 빚 좀 갚았다”며 씁쓸해했다. 주씨는 1990년 중소기업 판촉사원으로 일했지만 IMF때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2004년 서울시의 노점상 강제 철거는 그의 희망을 다시 앗아갔다.
이젠 희망도, 의지도 잃어버렸다. “죽으면 모든 게 다 끝난다”는 그의 말에선 깊은 체념이 묻어난다.
풍물시장도 엉망이지만 여기에도 못 들어간 사람은 더 절망적이다. 이모씨(42)는 청계천 토박이였다. 하지만 노점연합에 가입을 못해 풍물시장에도 못 들어갔다. 10년간 청계천에서 만물 노점을 했지만 노점연합 간부들에게 한번 밉보여 늘 따돌림을 당했기 때문이다. 청계천에서 밀려난 이씨는 서울 황학동 건너 동묘역 근처로 판을 옮겼다. 청계천 노점상들이 들어와 있는 동묘역에서도 발붙이기는 쉽지 않았다. 이씨는 다른 노점상이 자리를 뜨는 오후 6시나 돼서 겨우 판을 편다. 그런가하면 노점상의 생리를 이용해 풍물시장 점포를 몇개나 차지하는 악덕 상인들도 있다. 가족의 이름으로 올려 자리 몇개를 차지한 뒤 나머지 점포를 세놓는 것이다.
상인들은 이렇듯 각박해졌다. 삶이 각박해진 탓이다.
청계천 노점 철거 3년. 노점상들은 갈 곳도, 마음 둘 곳도 잃었다. 스산히 다가온 세번째 겨울. 또 한 번의 겨울 준비를 하는 이들의 어깨가 유난히 좁아보였다.
〈이고은·송윤경·김다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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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 ‘청계천 철거 날벼락’ 당한 김안젤로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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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젤로씨(42·세례명)는 ‘나까마’다. 쉽게 말해 중간상인이다. 주변 고물상을 찾아다니며 쓸 만한 물건들을 구해다 서울 종로구 동묘공원에 있는 상인들에게 파는 일을 한다. 헌 궤짝, 광주리, 스탠드…. 어쩌다 독일제 오디오라도 건지면 운이 좋은 날이다. 김씨는 이렇게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아 만원 한장을 손에 거머쥔다.
6년전 당한 뺑소니 사고로 목발을 짚고 다니는 김씨에겐 돌아갈 ‘집’이 없다
하늘이 ‘이불’이고 땅이 ‘요’다. 김씨는 밤이 되면 노원역 지하로 가 노숙을 한다. 어쩌다 돈이 좀 생기면 사우나, 만화방에서 따뜻한 잠을 청한다. 김씨에겐 호사다.
김씨는 3년전 청계천 만물노점상이었다. 넉넉하진 않아도 쉴 수 있는 월셋방 정도는 있었다. 김씨는 2003년 12월 아침을 잊지 못한다. 그의 작은 행복마저 앗아가 버린 그날 아침을.
“오전 8시쯤이었어요. 포클레인 12대, 용역 700여명이 갑자기 들이닥쳤죠. 불과 몇시간 전까지 팔던 물건이며 집기들을 다 쓸어갔어요. 하나도 못 건졌습니다.”
벌개진 김씨 눈에 물기가 비친다. 그날의 분노, 서러움, 절망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김씨와 다른 상인들을 동대문 풍물시장으로 보냈다. 노점연합 회원이 아니었던 김씨는 풍물시장에도 못 들어가고 동묘공원까지 흘러갔다.
김씨는 2005년 여름 서울 상계동 민들레밥집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삶이 힘겨울수록 뭔가 의미를 찾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요일은 시간을 내 4시간씩 급식을 돕는다. “저보다 더 힘든 사람이 많아요. 할 수 있으면 더 자주 봉사하고 싶은데….”
얼마전 김씨의 목발이 사고로 부러졌다. 김씨는 절뚝거리며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목발 하나를 구할 수 없을까’해서 였다. 서러운 인생. 그래도 김씨는 희망까지 버리진 않았다. “살다보면 좋은 날도 오겠죠.”
〈이고은·김다슬기자 freetr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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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시장도 철거’ 또 내몰리는 청계천 노점 |
2006년 12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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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복원된 청계천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최대 업적 중 하나다. 청계천 성공신화를 앞세워 이전시장은 대권가도를 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시장의 성공 이면에는 청계천 노점상 문제가 여전히 불씨로 남아 있다.
이전시장은 2003년 개발 당시 격렬하게 저항하던 노점상들을 큰 잡음없이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전시키는데 성공했다. 노점상들도 ‘풍물시장’에서 나름대로 정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동안 잠복해 있던 문제는 이전시장의 뒤를 이어 오세훈 시장이 취임하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오시장은 취임하자마자 동대문운동장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계획에 따르면 동대문운동장은 완전히 철거되고 노점상들도 자리를 떠나야 한다. 오시장은 줄곧 노점상 문제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풍물시장 노점상문제는 배려의 대상이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논리였다.
동대문운동장 개발은 내년 말부터 진행될 예정이지만 아직까지 서울시는 뚜렷한 노점상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상인들의 잇따른 민원과 면담 요청에도 묵묵부답이다. 다른 수많은 노점상들과의 형평성 논란에 대한 우려와 미리 카드를 꺼내지 않겠다는 전략적 판단이 깔려있다는 분석이다. 서울시의 침묵이 길어지면서 노점상들의 불안과 불만도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이때문에 풍물시장 노점상 문제는 민선4기 서울시정의 최대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 시 내부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송진식기자 truejs@kyunghyang.com〉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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