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의 춤과 노래에서 느끼는 ‘검은 대륙의 힘’ | |||||
[공연리뷰] 역동적인 아프리카 뮤지컬 ‘우모자’ | |||||
서은하 기자 sarah@newsmission.com | |||||
몇 년 전 남미에 잠시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가이아나’라는 브라질 위쪽에 고구마 모양으로 붙은 조그만 나라에서였다. 특이한 점은 이 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흑인이라는 사실이다. ‘남미인’이라고 할 때 쉽게 떠올려지는 라틴계나 아메리칸 인디언이 아니란 얘기다. 온통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남미 여러 국가 중에서, 이곳만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은 곳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식민통치 당시 아프리카의 영국령에 살던 흑인들이 대거 유입됐다고 한다. 이렇다보니 가이아나에 머물던 그 때, 말로만 듣던 ‘흑인 가스펠’을 종종 접할 수 있었다. 유명한 가수의 공연이 아니라 그저 작은 교회의 찬양 집회에서다. 그러면서 그들의 타고난 음악성과 리듬감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농담 삼아 ‘죄다 머라이어 캐리에 어셔’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이달 5일부터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이 한창인 아프리카 뮤지컬 <우모자>는, 잠시 잊고 있던 이런 놀라움을 몇 배나 크게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 눈에 보는 남아프리카, 아니 아프리카 대륙의 역사 아프리카어로 ‘함께하는 정신’을 뜻하는 <우모자>는 일종의 서사시다. 이 뮤지컬은 남아프리카의 역사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고 있다. 원시부족사회의 역동하는 생명력의 표현인 드럼 비트가 공연장을 울리고 막이 오르면, 탄탄한 육체들이 무대를 누빈다. 1막 ‘부족(tribe)’의 시작이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삶의 모습들이 여과없이 펼쳐진다. 원시사회에서도 지금과 똑같이 생명이 태어나고 젊은이들은 사랑을 속삭인다. 건장한 남성들은 전투나 사냥에 나서고, 아낙네들은 이들을 기다리며 소소한 일상을 꾸려가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 대부분 스와힐리어로 이뤄지기 때문에, 뮤지컬에는 독특하게도 ‘변사’가 등장한다. 중절모와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으로 대변되는 해설자가 아니라, 모건 프리먼을 닮은 할아버지가 중간에 한 번씩 대략적인 흐름을 설명하는 것이다. ‘프리먼 할아버지’의 나레이션을 좇아 배경은 어느덧 현대로 이동한다. 세상 모든 곳에서처럼 산업화와 도시화가 조금씩 시작되던 그 시절. 평화롭던 남아프리카 땅에 서구 문명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이를 위한 대표적 항구인 ‘더반’은 이제 젊은 여성들이 하나 둘 모여드는 곳이 된다. 2막 ‘더반 탤런트 대회’가 끝나고 3막 ‘요하네스버그의 거리 풍경’에서 남아공은 한층 더 서구화된 모습이다. 시골에서 상경한 어리버리한 청년이 ‘도시’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요하네스버그에서 좌충우돌하는 장면은 마치 우리네 5,60년대를 보는 듯하다. 이러한 분위기는 4막 ‘쉬빈 술집’과 5막 ‘광산과 호스텔’까지 막힘없이 이어진다. 전통적 가치가 점점 사라지고 금과 다이아몬드를 노리는 제국주의에 의해 변화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현실이, 배우들의 경탄할 수밖에 없는 몸놀림과 뛰어난 노래 속에 펼쳐진다. 또한 이 시기는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 정책)가 기승을 부리던 때다. 정작 이 땅의 주인인 흑인들이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철저하게 차별 당하던 시기인 것이다. 예의 ‘프리먼 할아버지’는 자국에서 이동할 때도 일종의 여권을 소지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담담히 설명한다. 정말 암울한 시기임에 분명하지만, 뮤지컬은 우울할 새가 없다. 흑인들에게 유난히 잘 어울리는 원색적인 의상과 경쾌한 선율은 그들이 이 어두운 시기조차도 삶에 대한 낙관을 버리지 않았음을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인상적으로 생각하는 대목은 6막 ‘가스펠’일 것이다. 이 막은 서구가 그들에게 전해준 것 중 어쩌면 유일하게 좋은 것일 ‘가스펠’이 그들의 삶을 위무하는 모습을 표현한다. 무대를 떠나 객석까지 늘어서서 합창하는 이들을 보면서 이들에게 있어 신앙이 삶의 깊은 설움과 한을 이기게 하는 힘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다시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힙합 음악 가득한 한 클럽에서 7막 ‘더 클럽’이 시작된다. 이곳에는 부모 세대와는 달리 유명한 배우나 스포츠선수가 되는 것이 꿈인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해설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그들이 부르는 노래 역시, 결국 부모들이 불렀던 그 노래인 것이다. 그래서 ‘음악의 힘’이 세대와 모든 것을 통합한다는 피날레에 도달한다. 창조주의 따뜻한 시선을 느낀다 <우모자>를 보면서 경탄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풍부한 성량과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놀라운 가창력. 약진하는 생명력을 표현하기에 조금도 부족함 없는 배우들의 몸놀림. 신들린 듯 타악기를 두드리는 연주자. 이처럼 40여 명의 출연진은 보는 사람이 되레 지칠 것 같은데도 호흡 하나 흐트러짐 없이 피날레까지 뛰고 날아오른다. ‘한 판 신나게 놀았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르는 이들의 난장(亂場)을 보면서, 대륙과 인종을 초월한 감동이 느껴진다. 그들이 부르는 가스펠이나 흥겹게 추던 스윙 재즈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예전에 대만의 소수민족의 공연을 볼 때도 그랬다. 한족이 유입되면서 도리어 주인 자리를 잃어버리고 소수자로 밀려나 이제 자신들의 역사를 관광 공연을 통해서나 선보이는 그들이다. 하지만 각 부족의 전통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생로병사를 표현한 공연은, 지금이 아니라 자유롭고 생기 넘치던 ‘그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 공연처럼 <우모자> 역시 이방인의 잣대로 함부로 ‘야만’이라 규정짓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여준다. 또한 근본주의 종교가 얼마나 폭압적으로 다른 문화에 대해 이해했는지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왜냐 하면 ‘야만’이라고 하는 이른바 ‘원시부족’의 춤과 노래를 보면서, 오히려 창조주의 미소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여한 개성과 마땅히 누려야할 모습 그대로 생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흡족해 하는 창조주의 넉넉한 마음 말이다. 오히려 문명화를 통해 순수한 감정이나 기쁨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이 ‘금기’에 가까운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나 싶다. 실상 타인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는 수시로 ‘금기’를 깨면서도, 헛기침을 남발하는 불쌍한 현대인들 말이다. 때문에 세련됨이라는 외피 속에 있는 우리에게 원시의 생명력이 던져주는 충격은 상당하다. 힘줄 하나 근육 하나의 떨림. 이처럼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가 주는 생명력은 외설이 아닌 감동이 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기교나 허위가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
[서은하 기자의 최근기사] | |||||||||||||||
|
출처 : 진실을 보는 따뜻한 눈
글쓴이 : sarah 원글보기
메모 :
첨부파일을 통해 일부 들을 수 있읍니다.
Venda Snake song &Jikela Emaweni.wma
'팝 & 뮤지컬 > 뮤지컬' 카테고리의 다른 글
Umoja-Meadowlands (0) | 2007.05.03 |
---|---|
Umoja-Emba Kwendla첨부 (0) | 2007.05.03 |
Umoja-Unomathemba (0) | 2007.05.03 |
지킬 앤 하이드 (0) | 2007.04.28 |
뮤지컬 우모자 Hobe.& Bawo Tixo Somandla (0) | 2007.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