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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자료실

[스크랩] 수리산 성지 탐방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이었다.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을 헤매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해 왔다 해서 '담배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고도 불리었던 수리산은 박해 시대 때 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 왔다.

최양업을 천주의 종으로 바친 최경환은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우들을 돌보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갖은 형벌을 받으면서 40일 이상을 항구함으로 버텨냈다. 이에 형리조차 그를 바위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러나 형벌로 헤어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마침내 옥사로 순교하였으니,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현재 외곽순환도로가 옆으로 지나가 성당 미사는 생가로 옮겨져 드리고 있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생가는 아니지요. 숨어살던 곳이라고 해야~~

 

 

황토집, 소박한 성당내부입니다.

 묘소로 가는 길에는 1987년 봄 안양 시내 교우들이 세운 14처가 있다. 또 같은 해 여름에는 동굴 성모상이 축성됐다. 

 현재 성인의 유해는 이곳에 없습니다,

최경환 회장이 순교한 뒤, 옥졸들은 그 시신을 가마니에 넣어 노고산(老姑山, 마포 노고산동의 서강대학교 뒷산) 밑에 갖다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둘째 형 최영겸(崔英謙) 부자가 그 시신을 찾아 이름을 적은 사발과 함께 그 산 중턱에 가매장하였다가, 몇 해가 지난 뒤 시신을 발굴하여 뒤뜸이 앞 수리산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최경환 회장이 1925년에 복자품에 오르게 되자 교회 당국에서는 1930년 5월에 그의 무덤을 찾아 시신을 발굴하여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하였고, 1967년에는 다시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 모셨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33호(1998년 6월), pp.95-96]

 

 성모동굴안의 목각성모상

 

 

 

 생가와 십자가의 길 오르는 계곡은 한참 가을맞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담배골에는 수십 가구의 마을이 있고 여기저기 주춧돌이 남아 있다. 

  

 최양업의 어머니 이성례마리아의 집-성물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성인이 순교하신 이듬해 1840년 1월 31일에는 그 부인 이성례가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를 앞두고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 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단풍이 곱게 물든 수리산자락. 지금은 등산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계곡을 따라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는데 주로 오리 , 닭,영양탕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안양역에서 내려 수리산성지가는 버스를 타면 됩니다.택시로는 4000원정도 나옵니다.  

 

 

 

 

 

출처 : guri-evergreen
글쓴이 : 삼족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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