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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참사람되어

[스크랩] (23) 인도에서 나의 가난함을 보다 - 앤드루 신부

 

인도에서 나의 가난함을 보다

 

 

 지난 해 인도방문을 요청받았을 때 나는 그 여행이 어떤 것일까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가겠다는 동의를 했다.

 

 떠나야 할 날이 다가오자 나는 그것이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순례의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두 달 동안이나 머무르는 것에 대해 놀랐으나 하느님께서 그렇게 마련해 주셨다고 믿었다.

 

 나는 약간 염려가 되었다. 내 나이와 건강, 인도의 시끌법적함그리고 호주의 낯익은 것들과 사람들을 떠남 등등에 대해서. 떠나기 며칠 전에 나는 이번 인도방문이 어떤 부르심이요 사명임을 기도 중에 느꼈다. 마치 1954년에 가족과 고국을 영원히 떠나 인도로 갔었을 당시에 이해한 것처럼 이번에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 때 그 사명감을 나중에 얼마나 되짚어 보았는지 모르지만, 지금 나는 인도방문이 모든 것을 놓으라는 부르심, 나에게 귀중한 모든 것들과 사람들을 놓으라는 부르심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기도할 수 있었다: "만일 주님, 당신이시라면 모든 것이 괜찮습니다. 나는 당신 안에서 당신과 함께 즐겁게 갈 수 있습니다. 나는 모든 이와 모든 것을 당신의 사랑스러운 손길 안에 즐거운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갖고 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 마리아여, 당신은 이 사명의 여왕이십니다."

 

 인도로 떠날 준비를 하면서 나는 짐을 많이 가져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옷 몇 가지로 충분했다. 책이나 자료없이, 그리고 미리 무엇을 생각하거나 강의할 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가는 것이다.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열기와 습기, 사방에서 부딪쳐 오는 군중이 나를 무겁게 누르기 시작했다. 적응할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낭만적인 영의 체험과 추억을 원했지만 처음부터 육체의 무게가 여정에 큰 부담을 주고 있었다. 그것은 신뢰하고 복종하라는 부르심이었다. 그냥 맡기라는...

 

 내가 떠나온 고향 땅 호주의 여러 가지 당면한 문제들이 즉시 사라졌다. 이 곳에서는 숨이 막히는 습기가 모든 것을 몰아내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다. 모든 게 그분의 손길 안에 있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또한 무겁고 부담이 될 수 있다.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과 형제들이 뜨거운 사랑으로 환영해 주었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는 요청은 끝도 없었다. 이렇게 사랑을 받는 것은 아름답고 또 특별한 은총이지만 요청과 초대가 지칠 정도로 이어졌다.

 

 둘째 날은 마더 데레사의 2주기를 맞아 묘지에서 미사를 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묘지와 그 곳에서의 순간은 참으로 힘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마더 데레사의 무덤가에 가득 모여들었고 부모들은 아픈 아이들을 데려왔으며 보통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필요와 희망과 고통을 갖고 왔는데, 그들은 마더 데레사의 끊임없는 생명 나눔의 정신에 힘입어 그들 자신의 신에게로돌아가고 있었다. 많은 참배객들은 힌두교도와 모슬렘들이었다.

 

 후에 조용한 날 나는 마더 데레사의 묘지에서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항상 아픈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들이 방문하고 있었으며, 기도와 바램을 지닌 힌두교인들, 마음의 갈증을 지닌 젊은 남녀들, 가난하고 상처 입은 이들, 수녀들과 호기심 많은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줄을 잇고 있었다.

 

 무덤 가에 앉아서 나는 마더 데레사가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분명한 얘기가 들렸다. 마더 데레사가 떠나고 나서 너무나 강력하게 다가오는 분은 예수였고 지금도 그분은 오고 계신다. 마더 데레사를 통하여 그리고 무덤에 오는 사람들을 통하여 살아 계시는 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다. 마더 데레사는 세상을 떠난 후 오히려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것은 위대한 성인들의 특징 중 하나이다.

 

 형제들 집에 머물면서 나는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들을 가까이 보았고 또한 수녀원들을 방문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평온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수녀들과 수사들 그리고 협력자들과 수많은 봉사자들의 끊임없는 헌신과 사랑에 감탄했다. 너무나 많은 삶들이 영감을 주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현존하시는 예수님과 성령의 기적이다. 아주 강력한 기적이다. 인간의 약함은 너무도 확실하지 않는가?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생명과 사랑을 침묵 속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그것을 지나쳐 버릴 것이다.

 

 루가 사도는 아들 예수의 유년기에 보여지는 마리아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이 모든 것을 마음속에 새겼다." 그러한 태도는 하느님의 것들을 숙고하는 매우 자유롭고 깨우침이 깊은 모습이다.

 

 가난하고 부서진 이들의 평온함은 또한 진정한 깊은 기도와 묵상을 부른다. 그것은 수많은 복잡한 사람들의 분노, 회한, 절망과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지상에서의 삶이 유배이며 기다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은총을 받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집트로부터 탈출하는 여정이다. 그 여정은 아직 온전히 약속된 땅에 도달하지 못한 여정이다. 학자, 독립인, 자존적인 사람들은 이 사실에 마음과 뜻을 복종시켜야 한다. 그러나 자만심이 이를 가로막는다... "영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되다... 슬퍼하고 우는 사람들은 복되다." 이것이 예수의 이상한 약속인 것이다.

 

 나는 인도에서 열기와 습기, 모기와 이질의 위협을 겪으며 유배의 현실, 새벽을 기다리고 있는 나의 현실을 깨달았다. 여행하면서 사람들의 아름다움과 살아 계신 하느님이 주신 신앙 가운데서도 나는 결코 평온하지 못했다. 나는 나를 생명으로 이끄시고 사랑하시는 분을 희망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인내가 필요함을 발견했다.

 

 쟌 바니에는 오랫동안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자신의 가난함을 드러내준다고 말해왔다. 내가 이 인도방문에서 겪고 있는 불편함은  이 사실을 크게 부각시켜 주었다. 나는 재빨리 내가 나 자신에게 얼마나 빠져있는가를 보았다. 이질은 이제 물러갔는가? 이렇게 모기에게 물리다가 말라리아에 걸리는 것이 아닐까? 불편하고 사람들로부터 가득찬 기차에 내가 앉을 자리가 있을까? 홍수 때문에 비행장에 가지 못하고 이 모든 것으로부터 빠져나갈 비행기를 놓치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께서 항상 마련해주시고 일을 처리해 주신다는 경험은 비록 수시로 돈을 떨어지게 만드셔도 나를 더 겸손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와 같은 경험 한 가지가 여기 있다. 어느 이른 아침에 나환자들과 함께 사는 사랑의 선교회 집에서 캘커타로 가는 이른 기차를 타기 위해 역에서 꽤 떨어져 있는 집을 나서면서 경험은 시작되었다. 보통 때처럼 나는 나 자신의 편리함을 찾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물론 모든 게 순조로웠다 - 의자가 비록 부서져있긴 했지만 괜찮았다. 도착해서 플랫홈으로 나오기 위해 기차에서 내려서며 나는 바로 내 발 밑에서 헌 담요에 누워 마지막 숨을 쉬고 있는 한 늙은 여인네를 보게 되었다. 그녀의 벌어진 입가에는 파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만 빠져있었던 비참함을 알게 되었다.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있었던 형제는 침대 위에서 죽을 수 있고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그들의 임종의 집으로 그 여인을 데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여인의 마지막에 다가온 은총이었다. 그러면 나에게 온 은총은 무엇인가? 그녀는 자신의 죽음 속에서 나 자신의 엄청난 비참함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놀라운 신비이고 자기 기만으로부터의 깊은 해방이었다.

 

 나는 육체적인 조건과 영적인 조건의 이같은 동일함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치유와 기적을 볼 때에도 너무나 분명하다. 거지의 눈멀음은 우리 모두의 눈멀음과 일치한다. 그분이 채우시는 군중의 허기는 우리 모두가 느끼는 영적인 허기와 같다. 그분이 죽은 라자로에게 돌려주시는 생명은 죄와 이기심의 죽음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생명이다.

 

 나는 이같이 새롭고도 놀라운 일치의 체험을 두 가지 대조적인 사건들 속에서 할 수 있었다. 이질에 걸려 고생했지만 나는 그것이 참다운 정화임을 점차 깨달을 수 있었다. 더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나는 익숙한 환경에서 떨어져나와 불편함을 겪었다. 나는 또 다른 문화 속에 있었다. 덥고 습기차고 많은 사람들, 시끌법적한 문화였다. 나는 유배중에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고통스러운 환경들은 나로 하여금 그동안 얼마나 호주 일에만, 그리고 호주에 살고 있는 나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 왔는지를 보게 해주었다. 그 모습은 매우 편협하고 제한적인 모습이었다. 인도에서 겪은 일들은 인간성에 대해 더 넓게 깨달을 수 있도록,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더 깊게 알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인도에는 활력이 있다. 여기에는 미래의 사람들이 있다 - 만일 서구의 물질문명이 그들을 밀어내지 않는다면. 호주는 대개가 불평하고 쇄락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의 땅이다.

 

 어느 날 아침 호우라 역으로 가면서 나는 우글거리는 군중을 보았다 - 인력거를 끄는 사람들, 큰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 열기와 습기 속에서 일 때문에 이리저리 뛰어가는 사람들. 나 자신은 약하고 불편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그들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그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살아남기 위하여 격렬하게 투쟁한다. 호주에서는 반(反)생명의 방법들을 찾는다: 낙태, 안락사, 사치, 사람을 바꿔치기하고 버리는 경제적 합리주의 등.

 

 인도의 어딜 가나 어떤 신성함을 느낀다. 하느님은 거부되지 않고 제외되지 않는다. 때때로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유약하고 왜곡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곳의 형편없는 조건 속에서도 살고 있는 것이다. 천박하고 세속적인 마음과 정신 너머에 신성한 것이 있다. 가난하고 부서진 이들의 현존은 바로 하느님의 현존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존은 우리의 생각과 전문적인 해결책, 이성을 넘기를 요청한다.

 

 인도에 두 달 가까이 있으면서 인도의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체험하였다. 나는 형제들, 교회, 인도 사회 그리고 나 자신에게서 인간의 약함을 보았다. 그러나 또한 인도의 가난한 이들, 형제들 심지어 가난한 나 자신 속에서 사랑하시고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성령으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았다. 물론 나의 방문과 나 자신이 꽤 오래 전에 나의 삶과 사랑을 함께 나누었던 형제들, 수녀들 그리고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의미를 주었다는 사실 또한 부인되거나 숨겨져 있지는 않았다. 어떻든지 이번 여행은 12년 전의 고통스럽고도 큰 축복의 결별 이후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과 관계를 다시금 확인해 주었다.

 

 그들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들의 아버지를 다시 발견한 것 같았다. 나는 1999년에 아버지 하느님의 절실한 필요성에 대해 자주 언급했었다. 특히 2천년을 앞두고 그분에 대한 성찰을 교회가 요청해 오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하다 -분명하게 우리들의 출산을 위해서-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우리의 성장과 성장해 가는 미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 세상의 아버지들이 반드시 그런 것처럼 불완전한 아버지라 해도 꼭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부서진 인간 세계에 관한 깨달음이 나온다. 아무리 불완전한 아버지들이라도 다시 그들의 아이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돌아설 수 있고, 상처받은 아이들은 인간의 불완전과 아버지들의 실패를 넘어 그 이상을 보려고 노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우리의 머리와 가슴의 침묵 속에서 그러한 노력이 시작될 수 있다. 그러면 아마도 사랑스러운 창조주 하느님의 손길과 함께 새로운 생명이 고통으로부터 잉태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신비이다. 그분 없이 아무  것도 없다.

 

 2000년 5월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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