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1 씨앗, 예수께서도 노숙자셨다.....
오랜 고심끝에 퇴회를 결정했다. 단 정식절차를 거쳐 퇴회하고 싶다는 뜻을 수도회에 전했다. 비록 수도복을 벗지만 앞으로도 하느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 제자로 살겠다는 의지에서였다. 환속후에도 하느님 중심으로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25년 수도원 생활을 정리하며 짐을 꾸리니 옷 몇벌과 책 몇권, 다해서 두상자가 나왔다. 그렇게 수도원을 나온 1년 뒤 정식으로 퇴회처분되었음을 통보 받았다....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뜻을 품은 사람은 샘솟는 우물처럼 넘치는 사랑을 가져야 한다 만약 예수님과 자신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활동부터 하게 되면 얼마 못가 말라죽기 쉽다.... 수도원 생활의 기본 중 하나가 육체노동이다. 가끔 일이 고될때도 있었지만 몸보다는 마음이 편한것이 더 낫다는것을 깨달은것은 오랜 수도원 생활에서 얻은 지혜이다....
#2 봄이야기
인천에만 2만5천여개의 식당이 있다고 한다. 모두들 돈을 벌자고 문을 연 가게들일 것이다 돈을 내지 않고 먹을수 있는곳은 없다. 또 무료 급식소가 몇개 있지만 어느곳도 서너그릇씩 배부를때까지 먹을 수 있고 오전에 왔다가 오후에 다시와서 또 먹을 수 있는곳은 없을것이다. 거디다 커피며 요구르트 같은 후식까지 내놓는데가 어디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민들레 국수집 이야기를 들으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다들 한마디 한다 "뭐야? 세상에 그런곳이 어디 있어?" "에이, 거짓말!" 2003년3월초에 국수집 준비를 시작하면서 4월1일 만우절을 문여는날로 정한것도 그런 거짓말 같은 일을 한번 저질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저 배고픈 분들한테 따뜻한 국수 한그릇 대접하고픈 마음으로 시작한 일, 그러한 첫마음이 그때나 지금이나 민들레 국수집의 전부다...
손님들이 늘어갈수록 일하는 손길도 더욱 바빠지지만 사랑의 기쁨으로 마음은 오히려 더욱 자유로워진다.....
"이슬 딱한잔만 드셔야해요!" 국수집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알코올 중독자가 많다. 도저히 밥을 넘길수 없는 메마른 속을 달래기 위해 긴급처방으로 소주 한잔을 건넬때도 있다....
"국수 열두 그릇 배달해주세요" 민들레 국수집 하면서 아주 드물게 듣는 말이다 "미안합니다만, 우리집에서는 음식을 팔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팔지 않는다는 말에 사람들은 "거짓말!"이라며 의아해 한다....
요즘은 음식 재료 창고를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흐믓하다. 모두 고마운 이들 덕분이다#좀 넉넉하다 싶으면 더 필요한곳에 나눠드리기도 한다. 약간 모자란듯이 좀 불편하게 살아야 스릴도 있고 멋있게 살수 있다....
#3 겨울 이야기
일모씨는 전기요금 내는데 보태라고 만원을 척 내놓았다. 나는 그가 그 추운 겨울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며칠동안 고물을 주워야 만원을 벌 수 있다는걸 잘 알고 있다 재물에 자기 안전을 맡기는걸 포기한 일모씨를 보면서 성경에 나오는 과부의 헌금이 생각났다. 이렇게 착한 분들의 수많은 도움으로 혹독한 겨울을 지내는 우리 손님들이 조금이나마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그마한 민들레국수집. 겨우 여섯명이 비집고 앉으면 꽉차는 허름한 식탁 하나뿐인데도 하루 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부름의 행복을 채우고 있다.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마저 내어놓으시는 고마운 분들 덕분에 기적이 이뤄지고 있다.....
건축 기술이 있는 안드레아가 뚝닥거려 만들어준 국수집 창고. 겨울에 연탄을 쌓아두거나 나눔 배추가 드렁오면 보관하고 고물 줍는 우리 손님들의 창고가 되기도 한다....
달걀프라이는 VIP 손님들에게만 제공되는 특별한 반찬이다. 국수집의 손님이 늘어가는데도 쌀이나 반찬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아름다운 마음들이 보여준 사랑 덕분이다. 나눔은 전염성이 강하다....
#4 민들레
서로 섬기고 나누는 사랑의 홀씨들이 날리고 날려 이렇게 새로운 민들레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2호점이 생겨나면 1호점 식구들이 도와주고 3호점이 생겨나면 1호점과 2호점 식구들이 도와주면서 민들레 국수집과 민들레의 집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면 좋겠다. 그럴수록 가난하고 외롭고 소외된 우리 손님들이 점점 더 많이 행복해지리라, 더 많이 살아나리라. 사랑의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고지는 아름다운 우리땅이 하나의 거대한 민들레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언젠가 청송교도소 자매상담을 갔다가 그곳에 소담스레 핀 민들레를 발견했다. 그 꽃을 보면서 우리 민들레 국수집 생각이 났다. 조심조심 캐어서 국수집 화분에 옮겨 심어놓았다.....
가끔 외로울때도 있다. 노숙하는 손님들이나 교도소 형제들의 친구가 되고 싶어 가까이 다가가지만 친구가 못되고 거리감 같은게 느껴질때.......
내가 하느님을 믿는것은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똑똑하고 부유한것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태어나고 하느님과 함께 살고 하느님께 가는 인생이 축복인 것이다.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하느님이 필요한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사는 것이다. 하느님이 내 인생 전부이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착한 사람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죄인들의 하느님, 현실에서 실패한 사람들의 하느님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 건강을 잃은 이들의 하느님, 버림받은이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하다....
베로니카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가족의 헌신과 응원이 없었다면 민들레 국수집 운영과 교정사목 활동을 지금처럼 잘해올수 없었을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족은 하느님 다음으로 소중한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