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형은 언청이였다.
어려운 말로는 구개열이라고도 하는데
입천정이 벌어져서 태어나는
선천성 기형의 한 종류였다.
세상에 태어난 형을
처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머니의 따듯한 젖꼭지가 아니라
차갑고 아픈 주사바늘 이었다.
형은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받아야 했고
남들은 그리 쉽게 무는 어머니의 젖꼭지도
태어나고 몇날 며칠이
지난 후에야 물 수 있었다.
형의 어렸을 때 별명은 방 귀신 이었다.
밖에는 안 나오고 허구한 날
방에서만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하기는 밖에 나와 봐야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나 되기 일쑤였으니
나로서는 차라리 그런 형이
그저 집안에만 있어 주는 것이 고맙기도 했다.
나는 그런 형이 창피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형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두번째 수술을 받았다.
비록 어렸을 때였으나
수술실로 형을 들여보내고나서
수술실 밖에 있는 의자에
꼼짝않고 앉아 기도드리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형을 위해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는 어머니를 보니
은근히 형에 대한 질투심이 들었다.
어머님이 그렇게 기도드리던 그 순간 만큼은
저 안에서 수술받고 있는 사람이
형이 아니라 나였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는 솔직히 나보다 형을 더 좋아했다. 가끔씩 자식들의 어린시절을 회상하시는 어머니의 말씀 속에서 항상 형은 착하고 순한 아이였고 나는 어쩔 수 없는 장난꾸러기였다. "그네를 태우면 형은 즐겁게 잘 탓었는데 너는 울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넘어지고 그랬지"
형은 나보다 한 해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수술 자국을 숨기기 위해 아침마다 어머니는 하얀 반창고를 형의 입술 위에다가 붙여 주시고는 했다. 나 같으면 그 꼴을 하고서는 창피해서 학교를 못 갈텐데 형은 아무 소리도 않고 매일 아침 등교길에 올랐다. 형이 학교 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고생깨나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형에게는 말을 더듬는 버릇이 생기고 있었다. 나는 그런 형을 걱정해 주기는 커녕, 말할 때마다 버벅거린다고 '버버리'라고 놀리고 그랬다. 형이라는 말 대신에 버버리라고 불렀고 내 딴에는 그 말이 참 재미있는 말로 생각되었다. 어머니가 있는 자리에서는 무서워서 감히 버버리란 말을 못 썼지만 형하고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는 항상 '버벌아,버벌아' 라고 부르곤 했다.
형은 항상 공부를 잘 했다. 항상 반에서 일등을 하였다. 비록 한 학년 차이가 나긴 했지만 형의 성적표는 항상 나보다 조금 더 잘 나오곤 했다. 어쩌면 그런 형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에서 더 그런 말을 쓰곤 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형이 어머니에게 무진장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 나는 그 당시 내 또래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한참 만화와 오락에 빠져 있었는데 항상 용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매일 밤 어머니의 지갑에서 몇백원씩을 슬쩍하고는 했었는데 그러다 어느날은 간 크게도 오천원이나 훔쳐서 (그 옛날 오천원은 큰 돈이었다) 텔레비젼의 덮게 밑에 숨겨 두었는데 그게 그만 다음날 아침에 발각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당연히 나를 의심했다. 어머니는 무서운 분이었다 게다가 그 며칠 전부터 돈 문제로 고민하고 계셨던 어머니였던지라 두려운 마음에 나는 절대 그런적 없었다고 철저하게 잡아 뗏다. 다음에 어머니는 형을 추궁했다 형은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했다. 짧은 순간이였지만 나는 염치 없게도 형의 대답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그 위기를 빠져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잠시 바라 보더니 형은 어머니에게 잘못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믿었던 형이었기에 더욱 더 화가 나셨고 나는 죽도록 어머니에게 매 맞고 있던 형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형이 매를 맞는 모습을 보니 철없던 내 마음에도 형에게 그렇게 미안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방을 나가 버리고서 방 한구석에 엎드려 있던 형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형은 숨조차 고르게 쉬지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그 후 얼마동안 형에게 '버버리'라는 말도 안 하고 고분 고분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동네에 제일 쌈 잘하던 깡패 같은 녀석이 형을 괴롭히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녀석은 형하고 나이가 똑 같았는데 질 나쁘기로 소문난 녀석이었다. 나는 형에게 빛진것도 있던 만큼 형을 위해서 그 녀석과 싸웠다. 싸우다가 보니 그 녀석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원래 애들 싸움은 먼저 코피 나는 쪽이 지는 것인지라 나는 기세등등 하게 그 녀석을 몰아 붙이기 시작 했는데 형이 갑자기 나를 말리는 것이었다. 나는 한참 싸움이 재미있던 판에 형이 끼어들자 화가 버럭났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던지라 아무 말 하지 않고 물러서고 말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후로 그 깡패녀석과 형이 아주 친해지기 시작했다. 형은 사람을 아주 편하게 해 주는 구석이 있었다. 사실 나는 형의 그런 면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 면 때문에 내가 어머니한테 귀여움을 더 못받고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형과 그 깡패 녀석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그 녀석이 장롱 밑에서 담뱃갑을 꺼내더니 형하고 나한테 권하는 것이었다. 그 때 담배라는 걸 처음 피워 보았다. 형과 나는 콜록콜록대며 피웠는데 그걸 본 그 깡패 자식이 좋아라 웃던 기억이 난다.
형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세번째 수술을 받았다. 그 후로는 입술 위에 반창고를 붙이는 짓은 그만두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말 더듬는 버릇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다시 형에게 버버리란 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TV에서 '언청이'란 말을 처음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뜻인지 잘 몰랐는데 얼마 후에 그 말이 바로 우리 형과 같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런 희귀한 단어를 알게 된 것이 참 신기했다. 며칠 후 형에게 버버리 대신 언청이라는 말을 썼다. 그 말을 들은 형은 마치 오래 전부터 그 말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듣고 있더니 내 머리에 꿀밤을 먹이면서 "그 말을 이제야 알았구나"하며 웃어 주었다. 왠지 그런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형에게 다시는 언청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었나 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다닐 적 어버이 날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 왔는데 어머니가 방 안에서 소리없이 울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 편지 같은 걸 읽으시면서 울고 계셨다. 어머니는 잠시 후 그 편지를 조금은 초라하게 생긴 핸드백 안에 넣으셨다. 나는 어머니가 방을 나가신 후 몰래 들어가 그 핸드백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조금 빛 바랜 편지봉투부터 쓴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편지까지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지금 막 읽으셨던 듯한 편지를 꺼냈다.
형이 쓴 편지였다. 형이 매해 어버이날마다 썻던 편지를 어머니는 그렇게 모아 놓고 계셨던 것이었다. 편지 내용을 읽어 보고는 나는 왜 그토록 어머니가 형을 사랑하고 형에게 집착하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그때 나에게는 어머니의 형에 대한 사랑이 집착으로 느껴졌다) 만약 내가 형처럼 태어 났다면 나는 나를 그렇게 낳은 부모를 원망하고 미워했을텐데 형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자기가 그렇게 태어남으로 해서 걱정하고 마음 아파하셨을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고 위로하고 있었다.
어느덧 한해가 또 지나고 형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 나도 중학교에 올라 갔는데 한 집에 살고 있음에도 형과 나는 다른 학교에 배정 받았다. 형은 중학교에 올라 가서도 항상 1등을 했다. 나도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었는데 항상 형보다 조금 못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형이 일기를 쓰고 있다는 시실을 알게 되었다. 가끔씩 형의 일기를 훔쳐 보곤 했는데 형은 시인이었던 것 같다. 형이 지은 시는 이해 하기가 참 쉬웠다. 교과서에 실린 시들처럼 복잡한 비유나 은유같은 것도 없었고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그런 시를 많이 썼다.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맴도는 그런 시들이었다. 나는 형이 썼던 시들을 참 좋아했던것 같다. 형의 영향으로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쌍밤』이라는 문학 써클에 가입하게 되었다. 연합써클이라 여학생들도 참 많았다.
같은 집에 사는데도 불구하고 중학교는 형과 다른 곳을 다녔는데 고등학교에서는 형과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나는 또 고등학교때 갑자기 키가 부쩍 자라 형보다 10㎝나 더 크게 되었다. 게다가 나는 얼굴도 어디를 가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잘 생겨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나는 형이 불쌍했다. 키도 작지 그렇다고 잘 생기기를 했나 말을 잘하나...형을 보며 나는 무언가 우월감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거에 형은 전혀 무감각했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어느 맑은 가을 날이었다. 집을 나서는데 참새 한 마리가 대문 앞에 죽어 있었다. 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서 착한 일을 한답시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나왔다. 나는 형이 칭찬해줄 것으로 잔뜩 기대 했는데 형은 모처럼 착한 일 하려고 하는 나를 만류했다. 그러더니 손수건을 꺼내 그 죽은 새를 담더니 집 뒤의 야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학교에 늦을까봐 미리 집을 나섰다. 형은 그날 지각을 해서 운동장에서 기합을 받았다. 팍팍한 다리를 두드리며 올라오는 형에게 참새는 어떻게 했느냐고 물어 보니까 뒷산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왔다고 했다. 그리고 참새를 묻고 나서 기도를 했다고 했다. 나는 내심 그깟 죽은 새 한 마리를 땅에 묻고 기도는 무슨 기도냐며 그래도 궁금해 형에게 뭐라고 기도 했냐고 물었더니 형은 슬픈 얼굴로 대답했다.
"만약 훗날 어느 때인가 내가 오늘의 너처럼 죽어 어느 집 앞에 누워 있으면 그때는 네가 나를 거두어 주렴"
형은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또 수술을 받았다. 정말 그 놈의 수술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말로는 형의 수술비로 집 한채 값이 날아 갔다고 한다. 우리 집은 가난 했다. 국민학교 때까지는 일년에 두번씩 이사를 다녀 우리 집을 가지는게 소원이었다. 거기다가 형의 수술비까지 마련 하느라 언제나 쪼들렸다. 아버지가 벌어 오시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어머니는 언제부터인가 돈 놀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 하셨다. 쉽게 말해서 고리대금업 이었는데 어머니는 악착같이 돈을 모으셨다. 어쩔때는 채무자들을 참 심하다 싶게 몰아 붙이시기도 했다. 부동산에도 손을 대 지금 있는 집도 장만 하시고 그러셨다. 어머니는 지독하실 정도로 돈에 집착하셔서 극장도 한번 안 가셨다. 극장에서 영화 볼 돈 있으면 차라리 맛있는 걸 사먹는게 낫다고 생각하실 정도였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형은 항상 마음 아파했다.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저렇게 되셨다는 것이었다. 형은 어머니에게 누가 될 만한 일은 한번도 해 본 일이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랬다.
그런 형에게도 어머니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형은 거의 돈을 쓰지 않았는데 그런 형도 돈을 쓰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길에서 거지를 보면 없는 돈에도 항상 얼마씩을 주고는 했다.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옆에서 아무리 저런 사람을 도와줘 봤자 하나 쓸데없는 짓이라고 설교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형의 행동에 대해 어머니께 말씀 드리면 어머니는 형을 참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곤 하셨다. 돈 이라는게 얼마나 피나게 모아야 하는 건데 저러느냐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형에게 항상 무서운 세상에 대해서 말하시곤 하셨다. 그러시면서 말 끝머리에 항상 이런 말을 붙이셨다. "너는 공부를 못하면 시체야"
형은 시체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일까? 그랬던것 같지는 않다. 지금까지 형이 자기 자신 때문에 뭘 걱정하는 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곁에 항상 여자가 많아서 용돈이 부족하고는 했다. 좀 부족하긴 했지만 어렸을 적처럼 어머니 지갑을 뒤지진 않았다. 형이 나 때문에 그렇게 모진 매를 맞았었는데 어떻게 그런짓을 또 할 수 있겠는가?.
그 다음해 겨울 우리 집에 경사가 하나 났다. 형이 대학에 합격한 것이다. 그런데 형은 서울의 좋다하는 대학을 다 마다하고 지방에 있는 P공대를 지망해서 합격을 했다. 나는 참 알 수가 없었다. 서울이 얼마나 놀기가 좋은데 그 외진 데까지 찾아가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형이 서울을 떠나던 날 나는 그때까지 어머니가 그렇게 많은 눈물을 보이시는 건 처음 봤다. 형이 떠난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손수건이 눈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보기 싫어 그 날은 혼자서 시내를 배회하다 집에 돌아 왔다. 있을 때는 잘 몰랐었는데 형이 없어지니까 집안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형은 자주 편지를 썼다. 그리고 어버이 날마다 선물을 들고 집에 찾아오곤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형은 어머니 생일날에는 선물을 하지 않았다. 꼭 어버이날 그렇게 선물을 들고 오고는 했다.
참 아직까지 말하지 않은게 하나 있는데 형하고 어머니는 생일이 같다. 어머니 말로는 예정일을 보름이나 당겨서 태어나면서 어머니의 생일에 태어 났다고 한다. 그리고 띠까지 같았다. 그렇게 되기가 참 힘든것 같은데 어째든 형하고 어머니는 전생에 인연이 참 깊었나 보다. 형은 어머니 생일 날 태어난 걸 항상 어머니에게 미안하게 생각했다. 즐거워야 할 어머니의 생일 날 자신이 그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태어나 어머니를 슬프게 한 것이 그렇게 못이 되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형에게는 백일 사진도 없고 돌 사진도 없다.
언젠가는 형이 어버이날 어머니 선물로 비싼 지갑을 사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도 참 그 선물을 보시고는 대뜸 하신다는 말씀이 "지갑은 벌써 하나 있는데 가서 다른 것으로 바꿔 올 수 없나?" 그런 말을 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형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후 그 지갑을 항상 곁에 지니며 다니셨다. 마치 형의 분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형이 대학교 2학년 겨울에 또 수술을 받았다. 정말 끝이 없을것 같던 형의 수술도 그게 마지막 이었다. 그때는 집안도 넉넉해져서 형의 수술 비용이 별로 부담되지 않았다. 그런데 수술 일자가 개강과 맞물려서 형은 할 수 없이 한 학기 동안 휴학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무척 기뻐 하셨다. 형의 얼굴도 많은 수술 덕분인지 약간의 수술 자국을 제외 하고는 어느 새 정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형과 이십년 넘게 살아 오면서 형의 얼굴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한편 학력고사에 한번 낙방했던 나도 힘든 재수 끝에 용케 Y대에 입학 할 수 있었다. 그 해 3월부터 8월까지 우리집은 참 행복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어렸을 적 형이 매 맞았던 사건에 대해 사실대로 말씀 드렸고 어머니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시며 형과 나를 바라보셨다. 형은 밤마다 어머니가 잠드실 때까지 어깨며 팔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는 했다. 어머니는 나보다 형이 주물러 드리는 것을 더 좋아 하셨다. 형이 안마를 해 주면 그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이였다. 아마 어머니는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라도 형만 있으면 행복해 했을 것이다. 매일 같이 웃음꽃이 피었다.
8월이 되자 형이 복학을 했다. 어머니는 떠나는 형을 보내기가 못내 아쉬웠던지 한 학기 더 휴학하면 안 되느냐고 형에게 말했다. 형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어머니 곁에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포항으로 떠나 버렸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있었다. 날짜를 세어보니 조금 있으면 어머니의 생일이자 형의 생일이겠구나 싶었다.
어머니의 생일이 일주일 정도 남았을때 그 날은 왠지 기분이 참 안 좋았다. 어머니는 나보다 더 심하게 느끼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 말씀이 마치 심장이 위로 올려 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하셨다. 그리고 숨을 거칠게 몰아 쉬셨다. 나는 어머님이 어디가 편찮으셔서 그러시는가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형을 걱정하고 계셨다. 아무래도 형에게 무슨일이 생긴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종일 초조하게 보내시던 어머니가 전화 한통을 받으시더니 금새 얼굴이 새 하얗게 변해 버렸다. 형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부리나케 형이 있는 포항으로 달려 갔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머리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소생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숨이 붙어 있는게 기적이라고 말했다. 하얀 시트를 가슴 위까지 덮은 형이 얼굴에 산소 마스크를 하고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형의 머리맡에 놓여진 오실로스코오프에는 간신히 이어지고 있는 형의 맥박이 보였다. 어머니는 촛점이 흐려진 눈동자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한걸음 한걸음 형에게 다가 가셨다. 그러더니 떨리는 두 손을 모아 누워 있는 형의 손을 꼭 잡으셨다.
그 순간이었다. 연약하게 뛰던 형의 맥박이 조용히 긴 수평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치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태 기다리다가 그제서야 안심하고 떠나는 것처럼....
차도를 무단 휭단하던 어떤 어린 여자 아이를 트럭이 덮치려는 순간 형이 그 앞에 뛰어 들었던 것이였다. 다행이 여자아이는 팔을 조금 다치고 말았는데 형은 트럭에 치이고 나서 머리를 땅에 부딪치고 말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슬픔에 넋이 나가 버렸는데 나는 그 순간 묘하게도 '참 형다운 최후였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이 천사를 그렇게 오랬동안 지상에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한동안 하며 통곡을 하고 계신 어머님 옆에 넋이 나간 채 서 있었다. 그 다음 며칠 동안 우리집은 무덤과도 같았다. 어머니는 음식은 커녕 물조차 드시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는 그렇게 떠난 형에게 한 없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어머니는 사흘째 되던 날부터는 온몸에 열꽃이 피기 시작했다. 참 지독한 열병이었다. 급히 의사를 불렀지만 의사는 영양제를 놓아주며 환자 스스로 일어나야지 별다른 수가 없다는 말을 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산 사람은 어쨌든 살아야 할 거 아니냐고 설득 했지만 어머니는 못 들은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지쳐서 더 우시지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누워만 계셨다. 그리고 밤이 되면 다시 고열에 시달리시고는 했다. 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마치 자신의 생일 날 아니 형의 생일 날에 맞춰 돌아 올 수 없는 저 먼 곳으로 형을 따라 가시려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드디어 어머니의 생일 날이 , 형의 생일 날이 돌아 왔다. 그날 아침 눈을 떠 보니 밤새 눈이 내렸었는지 온 세상이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평소 친했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어머니를 위로 하려고 한 분 두 분 모여 들었다. 아주머니들은 다들 한 마디씩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어머니는 눈조차 감으신 채 아무 말도 못 듣는 것 같았다. 나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 빠져 들었다.
그러던 그 날 오후였다.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나는 또 어느 동네 아주머니겠거니 하고 대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정말 태어나서 그런 광경은 처음 보았다. 수백 송이의 꽃들이었다. 이제껏 그렇게 많은 꽃을 본 적이 없었다. 배달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많은 꽃을 배달해 보기는 처음이라는 말을했다. 하얀 눈밭위에 수백 송이의 아름다운 꽃들이 펼쳐져 있었다. 정말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누가 보냈는가 보았더니 형.이.었.다...
어머니가 어느새 나오셔서 그 광경을 보시고 계셨다. 어디서 그런 기력이 다시 생기셨는지 애써 문틀에 의지하며 서 계셨다. 나는 형이 남긴 짤막한 생일 축하 메세지를 어머니에게 보여 드렸다.
"어머니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사셔야 돼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어머니 곁에서 함께할 겁니다"
어머니의 눈가에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조용히 번지기 시작했다. 언제 꽃배달을 시켰는가 보았더니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하기 바로 전날이었다. 생일에는 절대 선물을 하지 않던 형이 꽃 같은 것은 관심에도 없으셨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많은 아름다운 꽃들을 어머니의 생일,바로 자신의 생일에 보내온 것이었다. 그때 문득 마당에서 맴돌고 있는 참새 한마리를 보았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참새 한 마리가 마당에 앉아 있었다. 내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 알았는지 참새는 날개짓을 파닥거리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나는 그렇게 높이 나는 참새를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아득히 날아 오르더니 하늘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조금씩 기력을 찾기 시작 하셨다. 그런데 어머니의 눈빛이 바뀐걸 알게 되었다. 옜날에는 항상 돈에 얽메이고 근심이 가시지 않던 어머니의 눈빛에 한 없는 평화가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결혼하시고는 나가시지 않았던 성당을 다시 다니시기 시작 하셨다. 원래 어머니는 결혼하시기 전에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세례명인가 영세명인가 잘은 모르지만 어머니의 세례명은 '아네스'였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아참! 형의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형이 어떤 사회복지 단체에 가입하여 한 어린이를 돕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그 아이의 후원자는 바로 나다. 평생에 내가 누군가를 돕는거 같은 걸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한달에 한번씩 지로로 후원금을 부쳐주고는 한다. 그 동안은 자동이체로 했었는데 그러다 보니까 내가 누군가를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지내기가 일쑤였다. 그 애하고 만나 봤는데 그애 말이 형은 크리스마스나 그 애 생일뿐만 아니라 새 학기가 시작하면 학용품도 사서 부쳐주고 편지도 자주 써 주고 그랬단다.
그 애는 형이 참 보고 싶다며 지금 형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차마 형이 죽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사정이 있어서 저 하늘 너머 먼 나라에 가 있다고만 말해 주었다. 이러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뒤돌아 걸어 가는데 뒤에서 그 애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그렇게 좋은 형과 한집에서 매일 같이 사시니 얼마나 행복하세요?"
바보같이 그제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다. 형과 지낸 지난 이십여년간의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었는가를 ... 나는 왜 그렇게 어리석었던가.. 아이에게 무어라 대답해 주어야 할 텐데 갑자기 목이 메어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언제나 나에게 따듯한 미소를 보내주던 형의 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매일 같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렸을때 혼자서 방을 지키던 우리 형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말까지 더듬어대던 우리 형에게 위로의 말은 커녕 그 보다도 더 괴롭히기만 했던 나는 나쁜 동생이 아니었던가?. 그런 못된 동생을 위해 매까지 대신 맞아주던 착한 우리 형... 아이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천천히 돌아서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얼마나 행복했는데 그렇게 좋은 형이 있어서 나는 참 행복하단다"
하지만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눈앞이 그만 부옇게 흐려지고 말았다..
하덕규곡 가시나무, Andre Gagnon Piano
이글은 얼마전 어린이를 구하다가 대신 숨진 한 포항공대생에 관한 이야기 인데 그 동생이 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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