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롭게 살다 평화롭게 떠나는 기쁨--달라이 라마
제5장 인내
우리는 정말로 부처님을 친한 친구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부처님의 유일한 관심은 중생들의 행복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한편으로는 부처님에게 정의를 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생들을 완전히 무시한다.
인내심을 기르는 첫걸음은 인내심이 가져올 이익과 분노와 미움이 가져올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인내심을 수행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를 유지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인내심을 기르면 우리가 불리한 상황에 마주치거나 적대적인 세력을 만나더라도 불안해하지 않고 명료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용기와 강한 결단력을 키울 수 있다.
반면에 분노와 적개심은 이 생에서뿐 아니라 다음 생에도 우리에게 손해를 입힐 수 있다.
우리가 평소에 아무리 공손하고 상냥하더라도 분노가 폭발하면 우리의 좋은 품성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오랫동안 친구였던 사람에게 화가나서 우리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함으로서 우정이 깨질 수 있다.
분노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평화를 깨뜨린다.
분노는 갈등과 불행을 만들어낸다.
분노는 우리의 정신적 성장을 방해한다.
분노는 우리가 평소에 하지 않았을 거친 행동과 말을 하게 만든다.
우리가 분노에 휩쓸릴 때는 살인이라는 극단적 행동까지도 할 수 있다.
그런 부정적인 행동은 우리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겨놓기 때문에 우리가 다음 생에 삼악도에 태어나는 결과를 당할 수 있다.
우리가 무수한 전생들에 보시수행을 하고 부처님들에게 많은 공양을 올리면서 쌓았던 도덕적인 품성들이 한순간의 분노로 인해 다 파괴될 수 있다.
특히 보살에게 화를 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정신 수행을 방해하는 악행중에서 분노보다 더 파괴적인 것은 없다.
그러니 모든 방법을 써서 인내심을 기르도록 하라.
분노를 일으키는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불행과 걱정도 그 중에 속한다.
우리는 인생의 여러가지 사건이나 상황에 불합리하게 대응하기 쉽다.
무엇인가가 우리를 괴롭히면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기 쉽다.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차분한 마음으로 문제를 조사해봐야 한다.
첫 단계는 해결책이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문제가 해결될 수가 없는 것이라면 걱정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더 합리적인 방법을 취한다면 사건들 때문에 우리 마음이 불안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이가 우리를 막대기로 때린다면 평소의 감정적인 반응대로라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화를
내고 보복할 것이다.
불교가 가르치는 것은 그 경우에 마음을 진정시키고 실제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이 실제적인 원인이냐는 것이다.
미혹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 아니면 실제로 나를 때린 그 막대기인가?
이런 논리를 따라가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폭력적으로 행동하도록 자극한 번뇌에게 화를 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부정적인 사건들에 대응할 때 더 합리적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 마음이 분노의 고통으로 거득 차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평화와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마음 속에 분노가 일어나는 즉시 우리는 호흡이 힘들어진다.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잠을 자고 음식 맛을 즐길 수 있을 것인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평화를 느끼지 못하고 잠을 못 자니까 마음은 불안해질 것이다.
이 생에서 화를 낸 결과로 다음 생에는 못생긴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불교경전에서는 말한다.
물론 이중적인 사람들도 있어서 마음속으로 화가 날수록 겉으로는 더 미소를 짓는 사람들도 있다.
티베트의 귀족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제외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즉각적으로 분노를 나타낸다.
우리 마음 속에 분노가 불타오르면 얼굴이 금방 흉하게 변한다.
얼굴을 찡그려서 주름이 생기고 벌개진다.
고양이 같은 짐승들도 매우 흉한 모습으로 분노를 표현한다.
우리가 분노의 부정적인 성질을 자각하고 누군가가 화내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분노는 우리 모습을 흉하게 만들 뿐 아니라 우리를 어리석게 만든다.
분노는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누군가 피해를 입힌다면 우리는 분노로 대응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입은 피해를 그 분노가 보상해 주는가?
단기적으로는 분노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분노의 결과로 우리는 다음 생에 더 큰 고통을 당할 뿐이다.
또 다른 대응 방법은 우리가 이미 피해를 입었으니까 그저 참고 인내에 대해서 명상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이 훨씬 낫다.
그렇게 하면 다음 생에 올 고통을 피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가 화를 낸다면 우리가 이미 당한 피해에 덧붙여서 다음 생에 더 큰 고통을 겪을 것이다.
분노는 아무 쓸모없는 요소이다. 그저 무시하라.
밀교경전에는 "분노를 수행에 이용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 경우에 '분노'가 의미하는 것은 보통의 분노와는 다르다.
우리가 일상적인 분노를 수행에 이용할 수는 없다.
그런 분노는 우리의 자비심을 없애고 마음을 거칠게 하고 사납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고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들까지 우리는 분노로 죽일 수 있다.
우리는 분노로 인해 친구를 실망시키고 재능을 파괴시킬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분노는 결코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지 못한다.
분노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우리의 적이다.
인내가 가져올 이익과 분노가 가져올 손해에 대해 생각해 본 다음, 분노를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봐야 한다. 그 다음엔 그 원인을 제거해야 비로소 분노를 이겨낼 수 있ㄷ가.
분노를 부추기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의 좌절이나 우리가 원치않는 것을 겪었을 때의 실망이다.
분노는 온갖 파괴적인 결과를 수반한다.
분노를 부채질하는 연료는 정신적인 괴로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막아야 한다.
보통의 적에겐 우리를 해치는 일 외에도 디른 할 일이 많다.
적들도 잠을 자고 먹고 가족을 돌보고 친구를 만난다. 보통의 적들은 가른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파괴하려는 노력을 서로 협동해서 계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노는 혼자서도 언제나 우리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분노의 역할은 오직 우리를 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정신적 괴로움이라는 연료를 붓지 말아야 한다.
걱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도 아니고 행복과 평화를 불러오는 것도 아니다.
걱정은 우리를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우리에게 어떤 불쾌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느낄 때, 그것이 피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단지 그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하지만 피할 방법이 없다면 그것에 대해서 걱정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걱정해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근심과 걱정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원인과 조건들이 결합해서 결과가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은 자연법칙이다.
곤란한 상황이 바뀔 수 없는데도 우리가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근심한다면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두 사람이 같은 종류의 병을 앓고 있을 때, 한 사람은 큰 걱정에 휩싸이고 다른 한사람은 그렇지 않다면 어느 사람의 병이 더 악화될지는 분명하다.
수행자로서의 우리는 지고한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겪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사소한 세속적인 문제나 고통을 당하면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여러 종류의 고통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바꿀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바뀔 것이다.
고통에 대해서 고찰하면 실제로 좋은 결과가 온다.
살다보면 벌레에게 물려도 참고 배고픔과 목마름도 참고 가시에 찔리고 할퀴어도 참아내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사람들은 일단 익숙해지면 그런 사소한 고통들을 쉽게 견딘다.
우리가 더위와 추위, 바람과 비,질병과 상해로 인한 사소한 문제를 만났을 때 조바심을 내면 문제는 더욱 악화될 뿐이다.
사람의 마음의 안정된 정도에 따라 굳세기도하고 겁을 내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적이라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이 자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그 적이 끼친 피해도 자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그 적이 끼친 피해도 자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의 적이 총을 쏴서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실제로 우리의 육체를 관통한 것은 총알이지 그 적이 아니다.
무기가 그 사람에 의해서 휘둘러졌듯이 그 사람도 그의 마음속에 있는 번뇌에 의해서 조종된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그 사람에게 화를 낸다.
왜 우리는 그 피해의 근본 원인인 번뇌에게 화를 내지 않는 걸까?
왜 우리는 실제로 우리 몸을 관통한 총알에게 화내지 않는걸까? 왜 우리는 번뇌와 총알 사이에 있는 그 사람만 미워하는 것일까?
그 사람의 힘을 빌려 그 일이 벌어졌으니까 그렇다고 대답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도 원인이 되어 그 일이 벌어졌으니까 우리도 미워해야 한다.
우리가 그곳에 없었다면 아무도 우리르 쏘아서 다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우은 우리를 다치게 한 무기가 만든 결과만은 아니다.
우리의 몸도 책임이 있다. 적은 무기를 제공했지만 우리는 육체를 표적으로 제공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르 다치게 한다면 우리도 전생에 그와 비슷하게 다른 중생들을 다치게 했고 그 결과로 우리가 오늘 나타난 것뿐이다. 우리가 다른 중생들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저질렀던 잘못이 가져온 결과이다.
우리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적은 혼란과 무지 때문에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우리도 혼란때문에 화를 낸다면 둘 다 잘못이다.
한 사람은 옳고 다른 한 사람은 그르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오늘 겪은 피해는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악행이 불러온 결과이다.
우리가 그런 피해를 싫어한다면 왜 과거에 잘못된 행동을 저질렀는가?
모든 것은 우리의 행동의 결과로 생긴 것인데 왜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가?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정화시키지 않는 한 부정적인 결과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적이라고 생각되는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고 사랑과 자비심과 인내에 대해 명상하면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많은 악행을 정화시킬 수 있다.
적은 우리에게 인내수행을 통해서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하지만 적은 우리에게 해를 입힌 결과로 삼악도에 떨어져 오랜 기간을 고통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악행의 결과로 우리는 지금 적에게 피해를 입고 있다.
하지만 그 적은 우리에게 피해를 입혀서 악행을 쌓았기 때문에 다음 생에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의 적이 악행을 쌓은 것에 대한 책임은 실제로 우리에게 있고,우리의 적을 삼악도에 태어나게 만든 것도 우리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른 중생을 간접적으로 해친 것이다.
적은 우리에게 인내를 수행할 기회를 줘서 우리가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도독 돕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 보답으로 그를 지옥에 보내버리는 것이다.
적은 우리에게 인내심을 기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실제로 우리를 돕는다.
그러니 우리가 누군가에게 대해 고마워하고 싶다면 우리의 적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마음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아무도 마음을 만질 수 없고 아무도 마음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입힐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마음을 파괴할 수 없다.
누군가 당신에게 위협적인 말이나 거친 말이나 불쾌한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이 당신에게 실제로 해를 입히지는 못한다. 그러니 화를 낼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관심을 쏟지 말고, 당신의 마음을 평화롭고 고요하게하는 것이다.
당신이 불행하게 느끼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다른사람들의 모욕적인 말 때문에 당신이 부자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나는 당신이 조만간 그 물질적 재산을 포기할 수 밖에 없을 거라고 말하겠다.
당신이 재산을 얻기 위해서라면 화를 내도 좋다고 말한다면, 어떤 재산이라도 당신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만 소유할 수 있을 뿐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하지만 당신이 그 재산을 얻기 위해서 화를 낸 것에 대한 결과는 당신의 다음 생에 계속해서 받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친구와 친척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악행과 또 다른 많은 인연들 때문이다. 분노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육체를 가진 존재가 생명체나 비생명체에 의해 해를 입었을 때 왜 우리는 특히 마음을 가진 생명체에게 보복하고 싶어하는가?
사회적으로 화합이 이루어지지않을 때는 모든 중생들이 다양한 기질과 다양한 사고방식, 그리고 다양한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이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약간의 동요나 혼란이나 불안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과거에 저질렀던 행동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원한을 품지 말아야한다.그 대신에 사랑과 자비심을 길러라.
그런 일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선행을 쌓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어떤 것에 관련해서 미움의 불이 일어날 때는 우리가 공덕이 불타서 없어질 위험이 있다.
우리가 집착하는 대상을 없애야 한다.
때로는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사소한 즐거움을 희생해야 한다.
우리는 이 생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가 다음 생에 수 천년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할 위험도 무릅쓰고 있는 것이다.
지옥의 고통은 우리 자신의 목적뿐만 아니라 다른 중생들의 목적도 성취시키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인내의 장점과 분노의 단점을 이해한다면 분노를 없애기 위해 고난을 겪는 일을 참을 수 있다.
그런 고난을 참아냄으로써 위대한 성취를 이루게 된다.
종국에는 중생의 일시적 고통과 궁극적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무한한 공덕을 쌓고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얻기 위해 사소한 고난과 고통을 자발적으로 감수할 만하다.
당신의 품성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 누군가 즐거워하면 당신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품성을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것은 부당하다.
당신이 질투를 느낀다면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라는 기도문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것은 소망으로만 그치고 만다.
산중에 머물며 명상 수행을 하던 사람들이 약간의 명성이라도 얻고 나면 그곳을 떠나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내려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무상함과 고통에 대해 잊어버리고 질투나 경쟁심 같은 부정적인 품성들로 가득차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해 약하고 겸손한 사람들은 남을 속이지도 않고 못살게 굴지도 않는다.
무엇인가 자랑할 것을 가진 사람들만이 질투와 경쟁심을 일으킨다.
그러니 자신이 칭찬받고 존경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것은 부정적인 품성이 일어나도록 자극한다.
그러므로 누군가 항상 우리의 잘못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실제로는 우리를 보호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들은 우리가 번뇌로 인해 지옥에 태어날 것을 막아주는 것이다.
우리는 번뇌와 악행이라는 짐을 지고 괴로워하고 있으면서 왜 존경과 명성이라는 짐을 더 보태야 하는가?
우리에게서 존경과 명성이라는 짐을 없애려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우리는 고통의 길로 들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미치 부처님이 우리를 축복 해주듯이 우리의 적이 와서 우리가 그렇게도 집착하는 명성에 손상을 입힘으로써 으리가 지옥으로 떨어질 문을 미리 막아버린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겱ㅘ는 인내 수행이고 원인은 다른 사람들로 인해 인내심이 생긴다.
그렇다면 그런 피해가 우리가 공덕을 쌓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적 때문이다.
우리의 적은 우리가 남을 해치지 않으면서 인내심을 수행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회를 기뻐하고 적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적은 우리의 인내수행을 도와주어서 우리의 보살 수행을 강화시킨다.
인내 수행은 우리자신의 노력과 적의 존재, 그 두가지의 결과이기 때문에 인내의 결과로 쌓은 공덕을 우선 적의 행복을 위해 회향해야 한다.
부처님의 유일한 관심은 중생들의 행복이다.
우리는 개울에서 물의 흐름을 막고 있던 큰 바위 덩어리를 없애듯이 일단 돌을 치우고 나면 물은 즉시 흐르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적에 대해서 사랑과 자비심을 일으킬 수 있으면 우리는 모든 중생에 대해서 사랑과 자비심을 쉽게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적을 인내 수행을 위한 훌륭한 기반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또한 적에 대해서 강한 자비심을 일으킬 수 있으면 우리의 수행이 성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중생들을 기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명성을 얻고 평화와 행복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친구들을 얻고 적이 없어질 것이다.
우리가 윤회에서 머무는 동안에 많은 생애에 걸쳐 인내 수행을 한 결과로 아름다운 육체를 갖고 태어나게 된다.
우리는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살고 우주를 다스리는 자의 평화를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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