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결단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은 현대신학은 인간에게 강력한 결단을 요구하였다.
천국을 결단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영생을 결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인 것처럼.
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그분의 복음은 인간의 결단으로 깨달을 수 있는 진리가 아니다.
이 나라는 인간의 결단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인간의 결단이란 인간에게 부담만 더해 줄 뿐이다.
하느님나라는 믿음과 맡김으로 깨달을 수 있는 진리이다.
만일 결단할 것이 있다면 이 믿음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인생을 청산하는 것이리라.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강조하신 원수 사랑에서 그 사랑은 인간 결단이상임을 본다(루카6,27-37).
마주하고 싶지 않은, 용서할 수 없는, 하느님께서도 저주할 것 같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편에서 대단한 마음을 먹고 결단을 해야 가능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랑은 인간의 결단으로 도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눈에 미운 털이 박힌 저 원수 같은 놈은 하느님께서도 분명 미워하실 것이고,
내가 싫어하는 저놈은 하느님께서도 분명 저주하실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각일 뿐,
내 눈 밖에 난 그 사람도 사실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하느님의 사랑받는 귀한 존재이다.
하느님께는 원수가 따로 없으시다.
하느님께서는 옳고 정의로운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은혜를 모르고 남을 해치는 악한 사람에게도 고루 햇빛을 주신다.
하느님의 이 자비로우심을 인식할 때,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자가 될 때,
나에게 원수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나의 결단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를 사랑하게 한다.
사랑을 내 결단 이전에 내 마음에 심어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와 있음을 깨닫고 이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이 은총 곳에 살고 있음을 깨닫고
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이 은총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는 것,
그로써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결단을 못해 고민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와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하느님,제게 그 나라를 느끼게 하여 주십시오.
보기 싫은 사람,원수 같은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당신의 나라를 느끼며 살게 하여 주십시오.
저의 결단 이전에 저를 존재로 택하려 불러 주신 하느님.
제가 당신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늘 깨어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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