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세계
사람들이 무얼 주거나 앗아갈 수 있다는 환상을 실제로 떨쳐 버렸다면
우리는 생기 발랄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결과가
두려움과 탈출 능력의 상실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능력을 잃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싶다면 다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고 싶다면 마약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단순합니다.
의존을 버리십시오.
여러분의 존재를 가두어 넣어 숨통을 막아 온
사회의 촉수들을 떼어 버리십시오.
그것들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외적으로는 매사가 여전하겠지만,
계속 세상 '안에' 있더라도
이미 세상'의'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전혀 혼자가 된다면
마음 속에서는 이제 마침내 자유로울 것입니다.
마약에 대한 의존이 사라질 것입니다.
굳이 사막으로 갈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서도 올바르며, 사람들을 한없이 즐기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할 힘이 이미 없는 겁니다.
이것이 홀로 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독 속에서 의존은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능력이 태어납니다.
남들을 자기 중독의 충족 수단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그 과정의 두려움은
그것을 시도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마치 죽으려고 환장한 것 같죠.
가엾은 약물 중독자에게
이제껏 알아 온 유일한 행복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 같죠.
어떻게
그 맛을
빵과 과일의 맛,
아침 공기의 신선한 맛,
계곡 물의 시원한 맛과 바꾸어 놓을꼬?
금단 증상과 싸우는 동안은,
바야흐로 체내에서 약 기운이 사라졌다는 걸 겪으며
공허감과 씨름하는 동안은,
그 약말고는 아무것도 공허감을 채울 수 없습니다.
인정해 주는 한마디 말을 반기거나
누군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위로받기를 거부하는
그런 삶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정서적으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그래서 아무도 자기를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할 힘이 없어진
그런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특정인을 '필요로' 하거나 특별히 대하거나 자기 편으로 삼기를 거부하는 겁니다.
공중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고 여우들도 굴이 있건만
자기 인생 여로에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마다하는 겁니다.
언젠가 이런 상태에 도달한다면,
두려움이나 욕망으로 가려지지 않은
밝은 눈으로 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마침내 알 것입니다.
이 말은 낱말마다 계산된 말입니다.
'두려움이나 욕망으로 가려지지 않은 밝은 눈으로 본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사랑의 세계에 당도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아픔을 거쳐야 합니다.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에 죽는 것이고
전적으로 홀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까요?
끊임없는 깨달음에 의해서.
약물 중독자를 대하듯 무한한 인내와 연민에 의해서.
약물 갈구에 대처하여 삶의 좋은 것들에 맛들임으로써.
무슨 좋은 것?
좋은 일하기를 사랑하되,
사랑 자체 때문에 그 일을 즐기는 것 ;
사람들과 더불어 웃고 친교하기를 사랑하되,
매달리지는 않고 정서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으면서 함께 있기를 즐기는 것입니다.
'온 존재'를 바쳐서 행할 수 있는 활동들,
하도 사랑하는 일인지라 거기 종사하는 동안은 성공·인정·칭찬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 활동들에 착수한다면 그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연으로 돌아간다면 역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을 보내 버리고
산에 올라가 나무와 꽃들, 짐승과 새들, 바다와 구름들, 하늘과 별들하고
고요히 사귀십시오.
이미 말했거니와,
주변의 사물들을 응시하고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훌륭한 영성 수련입니까.
바라건대,
말들을, 개념들을 떨쳐 버리고
현실을 바라보며 현실과 접촉하시기를.
그것이 외로움의 치유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어울려 떠들썩함으로써 외로움을 치유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치유가 아니죠.
사물들로 돌아가십시오.
자연으로 돌아가십시오.
산에 오르십시오.
그러면 자기 마음이 자기를
아무도 곁에 없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없는
광막한 고독의 사막으로 데려왔음을 알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견딜 수 없어 보이겠지만,
그것은 홀로 있음에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일 뿐,
한동안 거기서 머물러 내면
그 사막에 문득 사랑이 꽃필 것입니다.
마음에 노래가 터져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봄일 것입니다.
약물은 간데없고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때 자유가 무엇인지,
사랑이, 행복이, 현실이, 진리가, 하느님이 무엇인지 이해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념들과 조건화,
중독과 집착을 넘어 서서 보게 되고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듯합니까?
멋진 이야기 하나로 이 점을 마무리하죠.
불붙이는 기술을 발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불붙이는 도구들을 가지고 추운, 몹시 추운 북쪽의 한 부족에게로 가서
불붙이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매우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는 불의 용도 - 요리와 난방 등 - 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불붙이는 기술을 배운 것이 무척 고마웠습니다.
그러나 미쳐 그들이 감사를 표하기도 전에 그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의 인정이나 감사에는 관심도 없었던 겁니다.
그들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였던 거죠.
그는 다른 부족에게로 가서 다시 그 발명의 가치를 보여 주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도 사람들의 관심은 대단했는데,
그곳 사제들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는 좀 지나친 관심이었던지,
사제들은 이 사람이 군중을 끌어모으고 있고
자기들은 인기를 잃고 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옥에 가두었다든지, 십자가에 못박았다든지, 그건 마음대로 표현하십시오.
그러나 이제 사제들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처럼 매우 지혜롭고 교활하기까지 했죠.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 사람의 초상화를 만들게 해서 사원의 중앙 제단 위에 두었죠.
불붙이는 기구들도 초상화 앞에 두고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초상화를 경배하고 불붙이는 기구들에도 경의를 표하도록 가르쳤죠.
여러 세기 동안 의무적으로 그 일을 했죠.
경배와 예배는 계속되었지만 불은 없었습니다.
불은 어디 있습니까?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
체제에서 근절된 마약은 어디 있습니까?
자유는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영성의 모든 관심사입니다.
비극적이게도,
우리는 이것을 보는 눈을 잃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 주님"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불은 어디 있습니까?
예배가 불로 이끌지 못하고 있다면,
숭배가 사랑으로,
전례가 현실에 대한 더 명료한 지각으로,
하느님이 생명으로 이끌지 못하고 있다면,
종교란
더 많은 분열과
더 많은 광신과
더 많은 적대를 낳는 것말고
무슨 소용일까요?
세상이 고통을 겪고 있는 건
통상적인 의미로 종교라는 게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고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깨달음을 통해서 생겨나지
달리 생겨나지 않습니다.
달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스스로 사랑과 자유와 행복의 길을 막고 있는 장애물들을 이해하십시오.
그러면 그것들이 제거될 것입니다.
깨달음의 불을 켜십시오.
그러면 어둠이 사라질 것입니다.
행복은 습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여러분이 낳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여러분이 가진 무엇이 아닙니다.
사랑은 여러분을 가진 무엇입니다.
바람과 별들과 비는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소유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것들에 탄복합니다.
그리고 탄복은
환상들을 깨칠 때,
중독들을, 욕망들과 두려움들을 깨달을 때 일어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첫째,
분석이 아닌 심리적 통찰이 큰 도움이 됩니다.
분석은 반풍수입니다.
분석이 반드시 통찰은 아닙니다.
한 훌륭한 미국 심리치료사가 매우 잘 표현했죠.
"중요한 것은 '아하' 하는 체험이다."
분석만으로는 도움이 안 됩니다.
분석은 정보를 제공할 뿐이지만,
'아하' 체험을 낳을 수 있으면
그것이 통찰입니다.
그것이 변화입니다.
둘째,
중독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예배와 찬양과 찬송에 바치는 그 많은 시간들이 자기 이해에 쓰인다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련만.
전례 의식의 공동 거행이 공동체를 낳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가슴 깊이 알다시피,
그런 의식들은
차이점들을 덮는 포장지 구실이나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공동체는
우리가 거기로 가는 길을 막아 놓는 장애물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두려움과 욕망들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을 이해함으로써 창조됩니다.
그 시점에서 공동체가 생겨납니다.
우리는 예배를
삶이라는 중대사에서 벗어나는
또 하나의 기분 전환으로만 삼아 버리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정부 안에서 일한다거나
큰 사업가가 된다거나
대단한 자선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산다는 건 모든 장애를 떨쳐 버리고
지금 이 순간을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하늘의 새들 …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추수하지도 않을뿐더러" -
이것이 사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
죽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죽은 정치인들,
죽은 사업가들,
죽은 교육자들,
살아나십시오!
예배는 이 살아나는 일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리고 곳곳에서 우리는 점점 더 - 여러분이나 나나 잘 알다시피 -
젊은이들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우리를 혐오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두려움과
더 많은 죄의식의 요구에는,
더 많은 설교나 훈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 배우는 데는 관심이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신비가들이 말하는 그 경이로운 일들을 어떻게 맛볼 수 있을까?
이것이 둘째 것, 이해하는 것입니다.
셋째,
동일화하지 마십시오.
내가 오늘 이리고 오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묻더군요.
"무력감을 느껴 본 적이 있소?"
여보시오. 물론 나도 걸핏하면 무력감을 느낀다오.
내가 받는 공격들도 있죠.
그러나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정말 오래 가진 않아요.
어떻게 하길래?
첫 단계,
나는 동일화하지 않습니다.
자, 무력감이 찾아옵니다.
긴장하는 대신,
나 자신에게 짜증을 내는 대신,
내가 우울이나 실망 등을 느끼고 있음을 이해합니다.
둘째 단계,
그런 느낌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시인합니다.
다른 사람,
예컨대
나에게 편지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외부 세계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는 것이죠.
내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한,
나는 그 감정을 붙들고 있는 게 정당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누구나가 이런 식으로 느끼리라고 말할 수는 없지.
사실, 잠들어 있는 멍청이들이나 이렇게 느끼겠지.
셋째 단계,
그 느낌과 동일화하지 않습니다.
"나"가 그 느낌은 아니지.
"나"가 외로운 아니지.
"나"가 우울한 건 아니지.
"나"가 실망한 건 아니지.
실망이 '저기' 있고,
그걸 바라보는 겁니다.
그것이 얼마나 빨리 사라져 버리는지 놀랄 일이죠.
깨닫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계속 변합니다.
구름은 계속 움직입니다.
이렇게 할 때,
처음에는 왜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는지도 온가지로 통찰하게 되는 겁니다.
나로서는 황금 글자를 쓰고 싶은 몇 문장이 여기 있는데,
A.S.닐의 [서머힐]에서 뽑은 겁니다.
배경부터 설명해 드려야겠군요.
아시겠지만 닐은 사십 년간 교육에 종사했습니다.
일종의 무정형 학교를 개발했는데,
소년·소녀들를 받아들여 그저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죠.
원하면 읽기와 쓰기를 배워도 좋고 싫으면 안 배워도 좋다,
남의 자유에 간섭만 안 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남의 자유에 간섭하지 말라,
그밖에는 자유다.
닐은 수도회 학교 출신들이 최악의 학생들이더라고 합니다.
물론 이건 옛날 일이죠.
그들이 스스로 억압했던 분노와 원한을 극복하는 데는
약 육 개월이 걸렸습니다.
반년 동안 반항하며 체제와 싸우고 있었던 셈이죠.
가장 나쁜 경우로,
한 소녀는
수업을 피해,
학교를 피해,
무슨 일이나 피해,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반항을 이겨내자 모두가 배우고 싶어했고,
심지어 "왜 오늘은 수업이 없어요?" 하며 항의하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흥미가 있는 수업만 받으려 했습니다.
변했죠.
처음에는 부모들이 자녀들을 이 학교에 보내 놓고는 두려워졌습니다.
"기율을 세우지도 않고 어떻게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어요? 가르치고 이끌어 주셔야죠."
닐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다른 누구나가 절망적이라고 여겼던 최악의 아이들을 받아들였는데
육 개월 안에 모두가 변한 겁니다.
그의 말 - 비범한 말, 성스런 말 - 을 귀담아 들읍시다.
"어린이마다 그 안에 한 신이 있다.
어린이를 틀에 맞추려는 우리의 시도들은 그 신을 악마로 바꾸어 놓는다.
어린이들이 우리 학교에 올 때는
세상을 미워하고, 파괴적이고, 버릇없고,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성질이 고약한 작은 악마들이다.
육 개월 후에는 그들이 악을 행하지 않는 행복하고 건강한 어린이들이 된다."
이것이 영국에서
학교 - 교육부의 정기 감사를 받는,
남녀 교장들이나 혹은 원하면 누구나 시찰할 수 있는 학교 - 를 가진
한 사람의 놀라운 말입니다.
놀라운 카리스마죠.
이런 일은 청사진으로 되는 게 아니죠.
특별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이죠.
교장들에게 행한 한 강연에서 닐은 말합니다.
"서머힐에 와 보시면 모든 과일나무에 열매들이 달려 있을 겁니다.
아무도 나무에서 과일을 따지 않습니다.
권위를 공격하려는 욕구라곤 없습니다.
잘들 자라고 원한이나 분노라곤 없습니다.
서머힐에 와 보시면 별명으로 난처해진 어린이라곤 보지 못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누군가 말을 더듬으면 짓궂은 아이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놀릴 수도 있습니까.)
말더듬이를 꼬집는 어린이라곤 보지 못할 겁니다.
결코, 이 어린이들 속에는 폭력이라곤 없습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니까요.
그게 이유죠."
이 계시의 말. 신성한 말에
귀기울이십시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는 겁니다.
학자·성직자·신학자 들은 무어라 하든,
세상에는
다툼·질투·알력·전쟁·적대감이라곤 없는 사람들이 있고 또 있어 왔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존재합니다.
아니, 말하기 슬프지만, 비교적 최근까지 존재했습니다.
내가 예수회 친구들을 사람들 속에 나가서 살며 일하게 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도둑질이나 거짓말이라곤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그 친구들은 장담하더군요.
한 수녀는 인도 북동쪽 어느 부족 속에 가서 일했는데,
그곳 사람들은 자물쇠를 채우는 일이 없더랍니다.
아무것도 도둑맞는 일이 없고, 한번도 거짓말하는 일이 없더라는 겁니다
- 인도 정부와 선교사들이 나타나기까지는.
어린이마다 그 안에 한 신이 있습니다.
어린이를 틀에 맞추려는 우리의 시도들은 그 신을 악마로 바꾸어 놓습니다.
페테리꼬 펠리니가 감독한 멋진 이탈리아 영화가 있죠.
한 장면에서,
그리스도교 수사 한 분이 여덟 살부터 열 살 사이의 소년들을 데리고 소풍을 갑니다.
수사가 뒤처진 서너 아이들을 거두어 걸어가는 동안
어린이들은 곧장 내달아 해변에 당도하는데,
우연히 매춘부인 한 나이 든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안녕하세요."
"안녕."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난 창녀란다."
어린이들은 그게 뭔지 모르면서도 알아들은 척합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은 더 아는 듯한 한 소년이 말합니다.
"창녀란 돈을 주면 어떤 일을 하는 여자야."
"우리가 돈을 주면 할까?"
"왜 안해?"
그래서 소년들은 돈을 모아서 줍니다.
"돈을 드렸으니 어떤 일을 하실래요?"
"그럼, 녀석들. 내가 무얼 했으면 좋겠니?"
아이들에게 떠오른 단 한 가지 생각은 그녀가 옷을 벗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합니다.
자, 소년들은 그녀를 보고 있습니다.
전에는 나체인 여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소년들은 그밖에 무얼 해야 할지를 몰라서
"춤을 출래요?" 합니다.
"좋지."
그래서 그들은 모두들 둥글게 모여 노래하고 박수를 칩니다.
창녀는 엉덩이를 움직이고 있고 아이들은 한없이 신명이 납니다.
이걸 본 수사가 해변으로 달려 내려와
그녀에게 야단을 치고 옷을 입게 하는데,
이윽고 해설자가 말합니다.
"그 순간, 어린이들은 오염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순진무구한, 아름다운 그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예사스럽지 않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아는 예수회원 중에 보수적인 편인 한 인도 선교사가 있는데,
나의 워크숍에 왔다가
내가 이 주제를 이틀에 걸쳐 펼쳐 나가자 괴로워져서,
이틀째 밤에 날 찾아왔습니다.
"토니, 당신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괴롭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소."
"왜요, 스탠?"
"당신은 내가 이십오 년 동안 눌러 왔던 한 문제,
소름끼치는 의문을 내 안에 되살리고 있소.
나는 거듭 자문했소.
내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듦으로써 오염시키지 않았는가?"
이 예수회원은 여러분이 자유주의자라고 보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경건한 정통파 신자로서 보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소박하고 티없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듦으로써 오염시켰다고 느낀 겁니다.
부인과 함께 남지나해 섬들에 간 미국인 선교사들은
여자들이 맨가슴으로 교회에 오는 걸 보고 질겁을 했습니다.
선교사 부인들은 여자들이 더 품위있는 복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입을 셔츠를 주었습니다.
다음 일요일에 그들은
편안하고 통풍이 잘 되도록 셔츠에다 두 구멍을 오려내고는 입고 왔습니다.
그들이 옳았죠, 선교사들이 틀렸죠.
자 … 닐에게로 되돌아가죠.
"나는 천재가 아니다. 어린이들의 발걸음을 지도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원죄는?
"어린이마다 그 안에 한 신이 있다.
어린이를 틀에 맞추려는 우리의 시도들은 그 신을 악마로 바꾸어 놓는다. …
나는
어린이들이 스스로 가치들을 형성하게 하는데,
그 가치들은 한결같이 선하고 사회적이다."
여러분은 이 말을 믿을 수 있습니까?
한 어린이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 즉, 너는 내 편이라고 느낄 때 -
그는 오케이인 겁니다.
이제는 폭력을 경험하지 않죠.
두려움이 없고, 그래서 폭력도 없는 겁니다.
자기가 대우받은 대로 남을 대우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 책을 꼭 읽어 보십시오.
성스런, 정말 성스런 책입니다.
읽으십시오.
그 책은 내 삶과 내가 사람들을 대하는 일에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기적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경쟁·비교·"그건 충분히 좋지 않아" 등,
내 안에 깊이 배어 있던 자기 불만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나를 떠밀지 않았던들
지금의 내가 되지는 않았으리라고 반박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모든 떠미는 것들이 나에게 필요했을까요?
그리고 아무튼,
누가 지금의 나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나요?
내가 원하는 건
행복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
평화로운 사람,
자유로운 사람,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싸움들이 어디서 오는지 아십니까?
우리 안에 있는 갈등을 바깥으로 투사하는 데서 옵니다.
내적 자기 갈등이 없는 한 개인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내면에 폭력이 없는 한 개인을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 안에는
효과적인, 심지어 냉혹하기까지 한 행동이 있겠지만
미움은 없습니다.
그가 행동할 때는 외과의사처럼 행동합니다.
그가 행동할 때는 애정을 가지고 정신 지체아들을 가르치는 교사처럼 행동합니다.
아이들을 탓하지 않고 이해하되 사정없이 행동에 뛰어듭니다.
반면에,
자신의 증오와 자신의 폭력을 덮어 둔 채 행동에 뛰어들 때는
잘못에 잘못을 덮친 겁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 격이죠.
물난리에 물붓는 짝이죠.
닐의 말을 반복하겠습니다.
"어린이마다 그 안에 한 신이 있다.
어린이를 틀에 맞추려는 우리의 시도들은 그 신을 악마로 바꾸어 놓는다.
어린이들이 우리 학교에 올 때는
세상을 미워하고, 파괴적이고, 버릇없고,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성질이 고약한 작은 악마들이다.
육 개월 후에는 그들이 악을 행하지 않는 행복하고 건강한 어린이들이 된다.
그리고 나는 천재가 아니다.
어린이들의 발걸음을 지도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일 뿐이다.
나는 어린이들이
스스로 가치들을 형성하게 하는데,
그 가치들은 한결같이 선하고 사회적이다.
착한 사람들을 만든다는 종교는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지만,
자유라는 종교는 모든 사람들을 착하게 만든다.
그것은 사람들을 악마로 만드는
내적 갈등을 ('내적'이라는 말은 내가 덧붙였습니다) 부수어 버리기 때문이다."
닐은 또 말합니다.
"한 어린이가 서머힐에 오면
내가 맨 먼저 하는 일은 그 양심을 부수는 일이다."
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난 알겠는데 그러니 여러분도 아마 아시겠죠.
의식이 있을 때는 양심이 필요없습니다.
감수성이 있을 때는 양심이 필요없습니다.
폭력적이지 않죠.
두려워하지 않죠.
어쩌면 여러분은 이것이 성취 불가능한 이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글쎄요.
그 책을 읽으십시오.
악의 뿌리는 자기 안에 있다는 이 진리를 문득 깨닫는 사람들을
나는 여기저기서 만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자신에 대한 요구와 기대들을 멈추고,
자신을 밀어붙이기를 멈추고,
이해하게 됩니다.
건전한 좋은 음식을 섭취하십시오.
실제로 먹는 음식 얘기가 아닙니다.
저녁놀, 자연, 좋은 영화, 좋은 책, 즐거운 일, 유쾌한 사귐 얘깁니다.
바라건대 저 다른 느낌들의 중독은 끊어 버리시기를.
자연과 접할 때
혹은 사랑하는 일에 몰두할 때
어떤 느낌이 옵니까?
혹은 매달림이 없이 터놓고 친밀하게 함께 있기가 즐거운 그런 사람과
진정으로 대화중일 때는?
그런 때는 어떤 느낌이 있습니까?
그런 때의 느낌들을 다른 때의 느낌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
논쟁에서 이길 때,
혹은 경주에서 이길 때,
혹은 유명해질 때,
혹은 인기를 얻을 때,
혹은 자자한 칭송을 받을 때 등등.
나는
후자를 세상 느낌들,
전자를 영혼 느낌들이라 부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얻고 영혼은 잃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없는 공허한 삶을 삽니다.
인기·인정·칭찬,
"나도 오케이, 너도 오케이"를 음식 삼기 때문입니다.
날 봐 다오,
날 좀 보소,
날 지지해 다오,
날 높이 평가해 다오를 양식 삼기 때문입니다.
우두머리가 되기,
권력 잡기,
경주에 이기기를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걸 먹고 삽니까?
그렇다면 죽은 겁니다.
영혼을 잃은 겁니다.
다른 더 좋은 영향을 섭취하십시오.
그러면 변화를 보실 겁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삶을 위한 온전한 설계를 제시해 드린 게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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