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의 또 다른 얼굴
입구에서 본 수용소
밖에서 본 수용소1
밖에서 본 수용소2
입구에 있는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 진다)
입구에 있는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 진다)
입구 좌우로 있는 철조망 1
입구 좌우로 있는 철조망 2
아우구스비츠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각 지역
수용소 내부의 위령탑
내부의 벽에 붙어 있는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
이 사진들은 수용소 독일 군인들이 직접 찍었다고
한다.
내부의 벽에 붙어 있는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
까스실에서 나온 색이 바랜 머리털(7톤 중 일부)
모아놓은 안경들
머리털로 짠 모직물
모아 놓은 소지품들
당시 최고가의 법낭 그릇들
당시의 사각으로 된 가죽가방들
보석을 찾느라고 뒤축이 떨어진 신발들
모아놓은 아이들의 인형들
당시의 죄수복으로 유태인,범죄자,소련인,유럽인등으로
윗도리에 표시를 하여 구별했다.
초기에는 입소하면 정면 측면등 사진을 남겼으나 그후 엄청난
사람이 들어 올 때는 그냥 까스실로 바로 갔다고 함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이 사람들은 정전후
구출 되었다고 한다.
수용인들이 먹었던 식사
참상을 알리는 조각품
수용소와 수용소 사이길로 운명의 길이 아니었을까?
당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녔으나 현재는 관광객만이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계속 가면 까스실로 가고 왼쪽으로 가면 수용소 입구
탈출이나 규칙위반등을 다스리기 위해 시범적으로
시체를 달아놓거나 공개처형한 곳
정면으로 보이는 흰벽에서 수만명이 총살 당했다.
왼쪽 기둥은 교수형 자리.
좌우 벽돌 건물은 수용소로 창문을 전부 막았으나
수용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까스실
나중에 잡힌 헤스 한명만을 처형한 유일한 교살대
까스실 내부 1
이곳에 들어가기 전에 수건과 비누를 주었다고 하며
조금후 싸이클론이 뿌려지고 기화하여 독까스가 나왔다고 한다.
까스실 내부 2
사망후 시체를 자동으로 태우는 곳.
이곳에 일하는 사람 역시 건강한 유태인들이 었다고 하니
그들의 심정이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까스실 입구
60년전의 일을 잘 모를 것같은 까스실 입구에서 만난폴란드 모자
수용소 내부에 있는 조각품
의학 실험용 짚시 어린이들
어릴 때부터 영화나 소설등으로 보아오던 그 처절하고 인류사에는 절대로 다시는 있어서는
안되는 곳을 들어 간다고 하니 가슴이 떨리고 소름이 끼쳐서 모골이 송연하였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광장에는 수많은 버스로 메워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줄
지어 들어간다. 어느 누가 그 당시의 유태인들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까마는 전 세계인들은
공통으로 처절한 감정은 가질 것이다.
수용소 입구의 철문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진다)'라고 씌어
있었는데 얼마나 아이로니컬한 문구인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폴란드 여자 현지인이 안내하고 한국인 현지 가이드와 같이 입구에 들어서니 양쪽 약 2m
정도로 사이를 두고 2중 철조망이 쳐져 있었는데 당시는 220V의 3상 전류가 흐르게 하여
포로들의 탈출을 막았으나 수용소 생활에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붙들고 죽은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폴란드어로는 '오쉬비엥침'이라고 부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영화에서 보는 허름한 판자집
으로 생각하였으나 의외로 아주 튼튼한 빨간 벽돌건물이었으며 이것은 원래 폴란드의 군인
막사였던 것을 나치들이 개조하여 수용소로 썼다고 한다.
현재는 전체 28동으로 내부를 전면 개조하여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유태인을
처형했던 가스실과 처형당한 사람들의 사진,시체를 태웠던 소각장 당시 유태인들이
소지하거나 착용했던 유물들을 종류별로 큰 방에 쌓아놓고 방 중간쯤에 유리로 칸막이를
하여 그 물건들을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수용소 내부 전시장은 비교적 넓으나 혼잡하고 줄을 서서 가며 보면서 설명을 듣는데 각
나라 별로 그나라 가이드 설명 듣느라고 세계의 각각 다른 나라 말이 들리면서 소란스럽고,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방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사람 우는 사람 성내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 눈을 감는 사람 등 다양하게 반응하며 관람을 하고 있다.
카펫이나 모직물을 짜기위해 자른 까스에 의해 색이 바랜 머리카락(약7톤), 빗,안경,신발
(뒤축은 숨겨진 보석 찾느라 파괴), 박스형태의 통가죽 가방, 옷가지,처형된 어린애 사진과
옷, 2만 명을 총살한 벽,온갖 유품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세기의 비극을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당시의 처참한 모습들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수용소에 도착한 사람들을 일일이 사진(수용소 내 독일 군인들이 찍어 보관)
으로 찍어 도배한 벽과 이를 통해 그들의 공포.전율.분노가 고스란히 나타나 있고, 수백만
명을 학살한 가스실등을 보며 인간이 이렇게도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허탈하고
숙연한 마음으로 수용소를 나왔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2,3 수용소가 있었는데 유태인 뿐만 아니라 폴란드 정치범, 쏘련군,
범죄자,집시등을 집단 학살하기 위해 대규모로 재건하였고 이곳 제1수용소가 유명해 진
것은 다른 모든 수용소는 파괴되었으나 소련군의 급한 진격으로 미처 파괴되지 못하여,
있는 그대로 남아서 인류에게 나치의 만행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은 학살을 알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만약 다 파괴 되었다면 증거가 없어서
몰지각한 일본같이 오리발을 내지는 않았을까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하게된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 폭파시킨 최대 수용시설이 있던 제2수용소에는 터만 남아 있는데
규모가 워낙 커서 53만평에 막사만 300개가 넘어 이곳 규모보다 10배 이상이었다고 하니
아마 학살 규모도 엄청 났으리라고 하며 당시에 유럽 전지역에는 이런 수용소가 1000 여개
있었다고 하니 나치의 만행은 끝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여행하면서 버스에서 본 영화 “쉰들러리스트, 피아니스트, 인생은 아름다워”등에서
잘 묘사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5천만 명이 죽었다는데 이중 학살된 사람이 2천만 명이며 그중
유태인이 600여만 명이나 되는데 이곳 아우슈비츠에서는 약 5년동안 350만 명이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이곳에 온 사람중 70-80%가 도착과 함께 가스실에서 학살 당하고 나머지는
감금.기아.중노동,실험,사형등으로 죽어갔다. 가스실에 사용했던 살인가스는"사이클론
(1통으로 400명 사살)" 이라는 독가스로 상온에서 27℃이상 올라가면 고체가 기화되면서
독가스가 되어 이 것에 노출되면 10~15분 안에 모든 생명체가 죽게 된다는데 당시 독일은
이 가스를 폴란드로 가져올 때 폴란드에는 쥐가 많아 쥐를 잡는 약이라고 속여 가져왔다고
한다.
유태인들의 머리카락은 직물이나 매트리스를 만드는데 사용했고 유태인들이 갖고 온
물건들은 유태인 노역자를 시켜 분류, 귀중품은 장교들이 착복하고 나머지 물품들은
전쟁물자 수급에 사용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는 지금은 약 5만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지만 당시에는 교통의 요충지로
유럽 전 지역에서 철도가 몰려서 폴란드를 침공한 히틀러는 이곳에 게토라는 유태인 특별
거주지역을 만들고 모든 유태인들을 그곳에 수용했다.
나치 친위대 사령관 히물러와 아우슈비츠 학살 책임자였던 헤스와 공모하여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만들었다고 하며 나중에 잡힌 헤스 한명만을 처형한 유일한 교살대가 가스실 옆에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 후세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러나 독일은 전후에 유태인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진심어린 사과와 충분한 보상을 하여서
현재는 따롤림을 받지않고 유럽연합이라는 대열에 포함되어 잘 지내고 있으나 일본은
아직도 그렇지 못하니 참 딱한 노릇이다.
전쟁은 인류역사에 큰 죄를 짓고 막대한 피해를 입히므로 없어야 하지만 위정자들은 그걸
모르고 역사는 전쟁과 복구를 지금까지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글 / 사진 / 김승권
음악 / Maksim Mrvica / Exodus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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