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오수록 2007/11/26(월) 19:30 (MSIE6.0,WindowsNT5.1) 221.132.72.99 1024x768 | |
주님을 본받음(6권고)
오수록(프란치스코)수사 맛세오형제회 영적보조자 1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 2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3 그런데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1. 구원의 원천이신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습니다(창세1,27).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기서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2,16-17).” 하느님께서는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를 따먹도록 허락하셨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권고하시고, 아무래도 염려스러우셨던지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고 경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권고와 경고를 완전히 무시하고 ‘하느님의 뜻대로’가 아닌 ‘자신의 뜻대로’ 실행하였습니다. 여기서부터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죄를 낳고, 그 죄의 결과로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왜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못하도록 완전 장치를 해놓지 않으셨냐?’고 하고, 또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으려 할 때 미리 제어하지 않으셨냐?’고 항변하며, 하느님께 문제를 제기하려고도 합니다. 만약에 하느님께서 혹자의 말대로 하셨다면, 인간이 죄에 떨어지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서 조정되고 움직여지는 로봇트나 노리개감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로봇트나 노리개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당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지으시고, 당신과 똑같은 인격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세상 처음엔 선만 있고 악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악이 언제 들어왔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선이란 모든 좋은 것을 뜻합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창조하시고, 창조를 마치신 다음 “보시니 좋았다(창세1,19;21;25)”고 세 차례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완전하게 창조되었고 세상에는 선만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유의지를 남용함으로 말미암아 불선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악의 상태는 곧 선의 결핍이요, 선의 부재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이신 하느님을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않거나, 하느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 뜻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곧 선을 부정하고 불선에 머무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선하신 하느님에 대해서 아주 명쾌하게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표현할 때,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최고 선이신 우리 창조주와 구세주이시고 유일하시고 진실하신 하느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선이신 하느님을 표현하기 위해 당신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다 동원해보았지만 언어의 한계성 때문에 좋으신 하느님을 다 표현해 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우리는 글줄 속에 숨어 있는 행간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영적인 권고 6장 1절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보자”고 권고 합니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인간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된 심연을 메우고 소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죄는 인간이 짓고 용서는 항상 하느님께서 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하느님을 부정하고 죄짓고 등을 돌린 인간을 다시 불러 깨우십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죽을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느님의 한량없는 자비가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발견합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구하오니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주소서. 먼저 제가 살고 있는 동안 제 영혼과 육신에 사랑하는 당신 예수께서 가장 괴로웠던 수난시간에 겪었던 그 고통을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게 해주소서. 다음은 그 고통을 견디어내실 만큼 불타올랐던 넘치는 사랑을 제 마음에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게 해 주소서(잔꽃송이 제3장).” 라고 기도합니다. 참으로 자신의 전존재를 던지는 감동스러운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첫 번째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가 들어 왔지만, 두 번째 조상인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자유의지의 주도권을 성부 하느님께 돌려드림으로 말미암아 세상에는 구원이 시작되었고, 하느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최고 선물인 자유의지의 주도권을 자신이 소유하지 않고 하느님께 모두 돌려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는 혼자 하셨지만, 구속 사업은 혼자하시지 않았습니다. 항상 인간에게 뜻을 물으시고, 인간의 응답이 있을 때 인간의 협조를 얻어서 실행하셨습니다. 그런 분이시기에 가브리엘 천사를 시켜 성모 마리아께 의사 타진을 하십니다.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났다(루카1,26-38). 성모 마리아의 ‘육의 정신’은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은 ‘육의 정신’이 겪어야 할 고난이었기 때문에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보류를 합니다. 그러나 가브리엘 천사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육의 정신의 호소를 넘어 ‘영의 정신’이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이렇게 성모 마리아께서 응답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보다 구체적으로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피앗’은 성모님께 부여된 자유의지를 완전히 돌려드리는 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교회는 순종의 모델로 삼고 있으며 구원 사업의 협조자라고 합니다. 성모 마리아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도 똑같은 순종과 자유의지의 주도권을 성부 하느님께 완전히 돌려드림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죽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에서 번민에 휩싸여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14,36).”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성모 마리아에게서 살펴볼 수 있었듯이 예수님의 ‘육의 정신’도 죽음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의 정신’은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의 정신’은 자유의지의 주도권을 성부 하느님께 돌려드리는데 주저하시지 않으시고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14,36).”라고 고백하십니다. 이렇게 당신의 전존재를 성부 하느님께 완전히 의탁하셨지만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육의 정신’은 다시 한 번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 모습의 절규를 하십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15,35)” 하고 외치는 절망적인 절규 속에는 철석같이 믿었던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고독감과 절망감이 엄습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울적한 고독감을 금방 극복하시고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23,46).”라고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의 몸을 완전히 의탁하셨습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정신’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나약한 육의 정신의 호소를 훌쩍 뛰어 넘으십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구원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얻어진 것입니다. 2. 성 프란치스코처럼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자기 비하,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얻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구원의 상징이고 표징인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은 능동적인 바라봄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기쁜 마음으로 걸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 모든 고통은 물론 죽음까지 당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모든 고통을 생각할 때 우리는 생활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삶을 철저히 본받아 사셨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로부터 제2의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부여받았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당신 생애를 통해서 너무도 철저히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성 프란치스코께서 걸으셨던 길을 따라 걷게 되면 우리는 구원의 삶을 살게 되고,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좋은 안내자요 길잡이이십니다. 그래서 성녀 클라라는 유언에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길이 되셨는데,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본받은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써 이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며 가르쳐주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카톨릭/성 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