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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성 프란치스코회

서울지구주보성인



이름: 이보나 (colbon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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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구 주보 성인~  

 

 

복자 둔스 스코투스




축일:11월8일(11월7일)
복자 요한 둔스 스코투스
Beato Giovanni Duns Scoto
Blessed John Duns Scotus


1224년 9월 10일 처음으로 작은 형제들이 도버 해협을 건넜다
(Thomas Eccleston의 연대기 “De Adventu Fratrum Minorum in Angliam”
-영국에서의 작은 형제들의 행적).

작은 형제들은 거기에서 바로 캔터베리와 캠브리지, 그리고 옥스퍼드로 퍼져갔는데,
그곳에서도 그들은 적절한 “학문 공동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 후 그들은 스코틀랜드에까지 가게 되었다.


1265년 요한 스코틀랜드의 Duns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 삼촌은 그 당시 스코틀랜드 감목구장이었던 Elias이다.
1278년 둔스의 요한은 Haddington에 있는 프란치스칸 학교에 입학하였고,
Dumfries에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더 높은 차원의 학문 공부를 위해 옥스퍼드와 파리로 보내졌다.
1291년 3월 17일 그는 Northampton에서 Lincoln의 주교였던
Oliver Sutton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캠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철학과 신학 교수로 일하였다.
파리 대학의 프란치스칸 학부에서도 가르쳤는데, 그 후 그는
보니파시오 3세 교황을 대항하여 프랑스 국왕 편에 서는 것을 거부하였기에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이것은 1303년의 일이었다.

스코투스는 그 당시 총봉사자였던 Valboa의 Gonzalvus의 추천으로
1305년 파리 대학에 복직되었다.
그는 1307년 다시 파리를 떠나 쾰른에 있는 작은 형제들의 학교로 갔다.
그는 1308년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다.

둔스의 요한은 프란치스칸 학파의 신학자이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의 수호자로 유명하게 되었으며,
또한 프란치스코 수도회서, 특히 쾰른과 이태리의 Nola에서 공경되기 시작하였다.

1991년 7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요한 둔스 스코투스를 복자품에 올렸고,
1993년 3월 20일 그를 공경하는 전례를 거행하였다.
(프란치스칸 신학자들과 교회학자들 -작은형제회홈에서)


쾰른에도 역시 프란치스칸들이 학생 수도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한 Duns Scotus는 1308년 11월 8일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여기서 얼마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요한은 1266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Dumfries에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Oxford에서 공부하였고 1291년 3월 17일 Northampton의 Oliver Sutton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파리에 가서 1293년부터 1297년까지 자신의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는 파리와 Oxford 그리고 캠브리지에서 가르쳤다.
그가 파리에 있는 동안 프랑스 왕을 옹호하고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반대하는
“libellus”(서명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학을 떠나야 했지만 1304년 그의 스승이었던
스페인의 관구 봉사자 Bonsalvus의 추천으로 파리 대학에 돌아왔다.
1308년 그는 쾰른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991년 그는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Scotus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예정론
(인간의 죄 없이도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는 주장)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와 관련한 주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학들 안에서의 프란치스칸들-작은형제회홈에서)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의 원죄없음이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원능력을 삭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이해 하였다.

그는 세가지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가 한 순간도 원죄의 지배 하에 있지 않도록 하실 수 있다.
둘째, 어느 한 순간만 원죄의 지배 하에 있게 하실 수 있다.
셋째, 마리아가 원죄의 지배를 받더라도 일정 시기가 지난 다음 원죄로 부터 성화하실 수 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이 세 가지 가능성에서 가장 좋은 것을 마리아에게 이루셨으리라고 확신하였다.
이로써 "하느님은 하실 수 있었고, 원하셨으며, 따라서 그렇게 하셨다."
(Potuit, voluit, fecit)라는 유명한 공식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관한 논쟁은 1854년 12월 8일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Ineffabilis Deus )에 의해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가 교의로 선포되기까지 계속되었다.

(마리아론-조규만지음.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프란치스칸 영성학교 제6기☆ 원문보기 글쓴이 : 유안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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