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범죄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쓰고 있다.
기독교는…인간이란 성실된 존재라는, 즉 모든 개인은 태어날 때 태어남으로써 이미 상실된 개인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이 각 개인을 기독교가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생이란 진지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
인간의 입맛과 기호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문자 그대로의 고통, 불안, 비참이 된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죄의 용서란 하느님께서 손 한번 들어 모든 죄과를 씻어버리고 죄의 결과를 모두 없애버리는 그런 것일 수 없다.
그런 바탕(望)은 범죄가 무언지 바로 모르는 세속적인 동경에 불과하다. 용서받는 것은 다만 '범죄 행위'(guilt)일
뿐, 더 이상 죄(sins)의 용서가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행복한 상황 밑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죄의 결과는 남아 있지만 범죄 행위는 용서받았다는 확신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한다. 죄의 용서는
이것저것 여러 가지의 일을 해 본 사람이 새 사람이 되고자 하여 끝내버리는 책략이어서는 안 된다. 죄의 용서를
받는다는 구실로 짐짓 죄를 짓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그렇다, 범죄 행위는 죄의 결과와는 판이하게 다르고
훨씬 더 무서운 것임을 이해하는 자만이 회개한다.
나는 '대속(代贖, satisfactio vicaria)과 인간의 자기 죄에 대한 갚음의 관계를 이렇게 이해한다.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죄가 용서받았음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람은 그의 이전 상태로부터,
성 바울로가 말하는 "죄의 율법"으로부터(로마서 8:25), 마술을 통하여 들어올려 지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죄를
용서받았다는 의식이 떠받들어 주고 절망에 맞서 투쟁할 용기를 주는 동안, 그는 갔던 길을 따라 되돌아와야 한다.
나는 죄의 용서를 확실히 믿는다. 그러나 나는 여태껏, 나의 형벌을 평생토록 져야 하고 소외(疎外)라는 고통스런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통화 단절을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고 알고 있다-비록 하느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생각을 하면 그것들이 조금 가벼워지긴 하지만.
죄의 상태에서 솟아나오는 부단한 범죄는 코츠커의 사상에서 찾아볼 수 없다. 죄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이라든가 결정적이고 최후적인 하느님 상실 같은 것은 유다적인 사고(思考)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생각이다.
또한 앞에서 말했지만, 유다인들은 유산으로 상속된 범죄라는 것은 모른다. 아담의 죄와 다른 우주적인 불행이
창조의 원질서를 오염시켰다고 믿은 그리고 그것들이 당대에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생각한 신비주의자들도
범죄의 짐을 후대 사람들에게 지우지는 않았다.
인간 실존은 하나의 연루(連累)라고 유다이즘은 말하고 있다. 인간은 존재함 그 자체로써 하느님과 얽혀 있다.
왜냐하면 존재함으로써 그는 "있어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이 곧 성(聖)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범죄의 곤경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분께 향한 개선(凱旋)이요 찬양이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산다는 것은 계속 축복을 받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딜레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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