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막힌다
부드러움이 쓸모없어진 곳에 엄격함이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코츠커는 부싯돌이 불꽃을 옮기듯 화를 내었다. 그의 침묵은 소름이 끼쳤고, 연설은
부르짖음이었고 그의 분노는 순수한 고뇌와 끊임없는 쓰라림이 모든 속박을 끊어버리고 모든 달콤한 위안을
썩게 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길은 설명하고 밝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항하고 부딪치고 더 높은 비젼과
감추어진 고통의 이름으로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살과 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 하늘을 뒤엎을 수 있겠는가? 그 높은 곳에 올라 천체를 명령할 수 있는가?
게다가, 어떻게 감히 하느님께 도전한단 말인가? 렙 멘들은 그의 확신을 성경과 [탈무드]와 [미드라쉬]에서
끌어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을 놓고 하느님과 의론을 벌이고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이긴 뒤로
많은 예언자와 라삐들이 경우에 따라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내세워, 하느님의 걷기 힘든
길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것이 일종의 기도 형식이 되었다. 실로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가혹한 심판에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중얼거리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주 하느님께 도전하여 당신의 뜻이 바뀌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려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가끔
반발하였고 하느님의 법령을 수정하기까지 했다.
앞에서 말했지만, 하늘의 문은 위대한 짜딕에게 언제나 열려 있었다. 그는 만일 스스로 높이 올라갈 수만 있다면
위대한 일들을 이룰 수가 있었다. 만일 그가 거룩함과 진리로써 싸운다면 그는 하늘에 이르는 모든 길을 뚫을
수도 있었다.
코츠커가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하늘이 나에게 말하기를 뉘우쳐 돌아서는 길이 아무데도 없다고 했다면,
나는 하늘을 뒤엎었을 것이다." 그는 또한 "면죄 제물을 드리는 규정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더없이 거룩한
제물이므로"(레위기 7:1)라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어디에 찾아내어야 할 죄가 있는가? 더없이
거룩한 것 안에 있다." 하시드란 세상을 끊어버린 사람이라고 코츠커는 말했다. 이 주장의 밑바닥에 흐르는 것은
세상과 진리 사이의 갈등 관계에 대한 깨달음이다. 오직 세상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은 진리를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코츠커는, 삶이란 계속되는 충돌이요 끝까지 싸우는 싸움으로서 항복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싸움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도덕적인 비겁자들을 경멸하였고 겁쟁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싸움은 격렬하였다.
그것은 자아(ego)와 자아를 배신하는 거짓과의 충돌이었다.
이것은 코츠커의 가르침 속에 표현된 그의 위치였다. 그러나 사적으로, 제자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 홀로
침잠해 있을 때 그는 또다른 싸움에 몰두하였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싸움, 하느님을 위한 싸움이었다.
재앙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보다 휠씬 더 심했다. 만일 모든 것이 순전히 인간 탓이었다면 회복하는 것도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이 시작된 것은 인간이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모세가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자 전능하신 분이 대답하셨다. "네가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출애굽기 33:18). 이 말은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앞-뒤가
바뀌어 나타났다는 뜻이다. 지금 있는 것은, 인간의 개념에 따르면, 있어야 할 것의 뒷면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이성(理性)에 등을 돌리고 서 있고, 하느님의 뜻은 감추어져 있었다.
강철로 된 심장을 가진 자라야 이런 세상을 배겨낼 수 있을 것이었다. 인간은 거짓과 잔인함, 악의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자마자 곧 구토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코츠커가, 하시드란 세상을 끊어버린
사람이라고 강조한 까닭이 여기에 잇다. 이 온 세상의 운명이란 것은 한번 슬프게 울어줄 만한 가치도 없다고
그는 말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허깨비들의 세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세상은 썩었다, 숨이 막히는구나!"
하고 그는 소리쳤다.
코츠커는 고뇌를 느꼈고 비극의 정체를 알았다. 그러나 그 치료책은 무엇이었던가? 살아남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다. 하느님께 도전함으로써 거룩해지고 용감하게 기도하고 영웅적으로 예배하고 그리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짓된 양보(讓步)에 속아 바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배짱이 보잘것없는 자신에 대한 인간의 각성을 깔아뭉개자는 것은 아니었다. 렙 멘들의 제자였던
알렉산더의 렙 헤노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코츠크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아는가? '사람은 자기가
벌레의 침(針)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 인간의 모호성과 그 운명의 모순이 바닥에 깔려
있음을 우리는 본다. 비록 하찮은 존재이긴 하지만 인간은 이 땅을 하늘의 높이에까지 끌어올리라는 소명을 받고
태어난 것이다.
렙 헤노크는 "하늘은 야훼의 하늘이요 땅은 사람들에게 주셨다"(시편 115:16)는 시편의 한 구절을 이렇게
풀이하였다. 전능하신 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 하늘을 지으셨고 한편으론 땅은, 그것을 하늘로 만들라고
인간에게 주셨다. 코츠커에게는, 따라서, 땅을 하늘로 만들라는 엄청난 사명이 주어졌던 것이다.
렙 헤노크는 모세가 이 일을 제대로 수행하였다고 생각했다. 모세가 시나이에서 토라를 받았을 때 기적이 일어나
우둔한 인간의 마음들이 성스러워졌던 것이다. "그 산은 하늘 한가운에까지 치솟는 불길에 휩싸였다"(신명기
4:11). - 산은 유다인들이 "하늘의 마음"을 받아들일 때까지 타올랐다.
아마도 이것이, 렙 멘들이 왜 그렇게 가혹해야 했는가를 설명해 줄 것이다. 그는 시나이 산처럼 스스로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불꽃으로 타오르며, 그는 땅의 사람들을 하늘의 백성으로 변모시키는 비젼을 실천에 옮겼다.
그러자 진실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인간들의 마음은 진흙에 던져져 있고 진흙에서는 불길이 솟구치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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