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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독서록

새 마음을 주리라. -치유하는 고해성사

치유하는 고해성사 새 마음을 주리라.

  스콧 한 지음 강 우식 옮김.

 

왜곡된 기억.. 인간의  영적.도덕적 삶의 '근본'을 해치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의 하나는 '각색하기.뒤바꾸기.퇴색시키기.생략하기.어감을 달리하기 등을 통해

기억을 왜곡하는 것은 오류를 사실로 굳히는 가장 교활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왜곡시키기 시작하면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핵심을 놓치게 된다.

 세상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되고 인간관계도 소원해지고 목적의식이나 자의식마저 잃어버린다.

 그러한 왜곡은 양심 성찰을 해도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정직한 기억은 오직 전인적으로 정직할 때만  가능하다.

 정말 무리한 요구 일수도 있으나 성인들의 삶에서 보듯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가 솔직하길 바라신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막다른 길....

 우리는 하느님의 품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싶어하면서도 그분께 등을 돌리기가 훨씬 쉽다고 속삭이는 내면의 어두운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비밀이나 거짓없이 진실하게 살고 싶어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고하지 않고 덮어두는 것이 낫다고 속삭이는  내면의 어두운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사람에게는 바른 길로 보여도 끝내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 있다(잠언 14.12)

 어떤 길이 죽음에 이르는 막다른 길일까?

 그것은 아무리 바른 길처럼 보이더라도 하느님이 바라시는 방법으로 죄를 고백하지 못하도록 이끄는

길이다.   애석하게도 인류는 태초부터 그 길을 걸어왔다.

# 고해성사의 집전자

  그리스도께서는 사제를 통해 죄인을 용서하시고 저지른 잘못을 기워 갚을 수 있도록 그 길을 마련해 주신다.

 사제는 속죄 방법을 정해준다. 교회 역시 죄인을 위해 기도하며 그의 속죄행위에 동참한다.

 그뿐만 아니라 참회자는 사제에게 죄의 유혹을 이겨내고 성덕으로 ㅇ나아가는데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듣는다.

 사제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죄 사함의 선언이다.

참회자 편에서 해야 할 일, 곧 통회.고백.보속을 모두 이행했다면 죄 사함의 선언인 사죄경은 참회자의 영혼에 엄청난 작용을 한다.

사죄경은 우리 죄를 못 본 척하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아니다. 오해다 하느님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죄경은 단지 사제가 웅얼거리는 못알아듣는 소리가 아닌 하느님의 권능있는 밀씀이다.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에제36,26)

 그리스도는 무덤에서 라자로를 일으키신 것보다 더 큰 기적을 죄 사함의 말씀을 통해 행하신 것이다.

 부활의 은총이라고 한다.

 치유의 은총이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이는 '죄인의 자발적인 협력과 고해성사로 죄의 상처가 아물고 치유되기 때문이다.

 ......

# 죄는 왜 달콤한가?

 사물에 대한 무절제한 호감 때문에 가장 훌륭하고 가장 좋은 것을 버릴 때 인간은 죄를 저지른다.  가장 좋은 것이란 하느님,히느님의 지릴,하느님의 계율이다.

 가장 훌륭한 것들에 베헤 격이 낮은 사물들에도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만큼 큰 즐거움을 주지는 못한다. 의로운 사람은 그분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며, 고결한 영혼은 그분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

 아우구스티노는 과수원의 배를 훔친 이유에 대해 친구들과의 우정. 그들과 함께 나누게 될 웃음 �문이었다고 했다.

 우정,동지애, 웃음은 모두 좋은 것이고, 하느님의 축복이며 갈망한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 대한 욕구를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분꼐 순종하고자 하는 욕구보다 우선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도 악한 것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덜 좋은 것을 원하기 �문이다.

우리는 모든 즐거움을 창조하신 분이며 즐거움의 정ㅂ점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지리를 추구하는 대신 하찮은 일과 덧없는 감각적 즐거움에 몸과 마음과 영혼을 내맡긴다.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선물에 집착함으로써 정작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등을 돌린다.

# 탐욕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피조물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점이 아니라 피조물을 하느님보다 더 매력적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아우구스티노의 표현을 빌리면 문제는 우리의 '사물과 즐거움과 현세의 영예에 대한 무절제한 호감이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의 문제였다.

 에덴동산의 금단의 열매는 악하지 않았다. 

 선악을 알게하는 지혜의 나무는 보기만 해도 좋았다.

그것은 하느님꼐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 과실은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고 먹은 사람에게 지혜를 가져다 주니 유익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느님꼐서는 인류의 첫 부부에게 더 좋은 것, 곧 초자연적인 선을 위해 그 좋은 것들을 모두 희생하라고 이르셨다.

 그런데 뱀에 대한 두려움(히브리2.14-15)�문에 그 부부는 하느님의 명을 실행에 옮기는데 실패했다.

선악과는 악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순종은 분명 악한 것이었다.

지혜를 갈망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듯 잘 익은 사과를 먹고 싶어하는 것 또한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한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아담과 하와는 우선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순서를 뒤바꾸어 버림으로써 눈앞에 당면한 욕구, 곧 안전과 자기보존과 지식과 감각적 즐거움을 채우는 반면에 더 고상하고 숭고한 것들, 곧 믿음 ,희망, 사랑과 같은 가치는 유예했다.

 그들이 직접 악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덜 고상한 것들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들은 당장에 실질적인 것들을 선택했다. 

자기보존욕구와 배고픔은 뿌리 깊은 본능으로 강렬한 육체적 반응을 보인다. 

 믿음 ,희망 ,사랑을 갈구하는 육체적 욕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내분비선이나 장기나 호르몬은 없다.

 아담과 하와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의지적으로 일치시키는 것으로 덜 고상하게 보이는 모든 욕구를 희생시키는 일이었다.

 선택에는 결과가 따르는 법이다. 그들의 요구는 또 다른 새로운 요구를 만들어 냈으니 알몸을 가려야 했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야했따.

 덜 고상한 욕구에 우선순위에 두었고 ,이제 그 욕구가 두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에는 알몸이면서도 두렵지 않았으나 이제는 알몸 때문에 두 사람에게 혼란스런 감정이 일어났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려야했다. 

 낙원이 더 이상 낙원이 아니다.

인류의 첫 조상이 하느님꼐서 의도하신 인간내면의 질서를 뒤바꾸어 놓았다.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의 영혼이 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다시 말해 즐거움과 두려움, 갈망과 욕구가 영혼을 지배하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영에 대한 육의 반란이라고 했다.(갈라5.10-17;에페2,3) 신학자들은 이를 탐욕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원죄의 잠정적인 결과롤 말미암아 혼란스러워진 인간의 욕구 또는 욕망을 일컫는다. 탐욕은 정의상 무분별하고 변덕스러우며 비합리적이다. 

인간의 무질서한 욕망은 이성의 질서를 거슬러 반항한다.

 탐욕 자체는 죄가 아니나 원죄의 결과이며 본죄의 원인이다. 그것은 죄를 향한 내재적이며 생득적인 성향이다.  그러나 탐욕은 개인적 행위가 아니며 그것 자체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를 유혹에 취약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며 쉽게 죄를 짓게 한다.

 

#탐욕의 결과

탐욕은 끝이 없어 우리를 끊임없이 끌어내린다.

우리가 피조물에게 끌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더더욱 감사하고 찬미하며 사랑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위해 피조물을 이용한다.

그것이 아내든 친구든, 과자든 술이든, 책이든,자동차든 말이다.

그러나 욕구를 충족시킬 수록 점점 더 구 욕구에 지배당하게 되며 갈 수록 필요로 하고 이런 피조물을 필요로  할 수록 하느님은 필요없다고 느끼기 마련이다.

 하느님꼐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는데도 말이다.

 

 탐욕은 우리를 유혹에 약하게, 유혹당하기 쉽게 만든다.

세상은 탐욕을 통해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옳지 못한 생각을 한다고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그 옳지 못한 생각이 즐겁다고 생각될 때 비로소 마음으로 죄를 짓게 된다.

마음으로 짓는 죄도 죄다. 서둘러 뉘우치지 않으면 머지않아 죄를 짓게 된다.

 

 탐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교회의 가르침은 세 가지를 꼽는다.

 

지성이 흐려진다. 

 이성이 본능과 감정,직감의 지시를 받는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은총,계시된 진리,우리의 노력으로 육의 선동을 넘어서서 생각할 수 있다.

 

의지가 약해진다.

의지는 오직 선한 것,좋은 것만을 바란다. 의지는 지성이 제공하는 정보를 토대로 작용하는데 지금은지성이 흐려져 있다. 그래서 의지는 그릇된 방향으로 작용한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선택한다. 

 악이라는 것을 알면서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자살이나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히틀러도 인종청소를 자행하면서도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탐욕이 지배하게 되면 인간 본성은 그 정도로 비뚤어질 수 있다.

 

욕망이 혼란스러워진다. 

음식과 수면, 성적 친밀감에 대한 욕구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창조된 목적대로 하느님을 향한 다면 말이다.

그러나 탐욕으로 인해 그것들이 혼란스러워졌고.

 결국 몸은 식탐과 나태와 음욕과 그 밖의 죄를 짓도록 우리를 끌어내린다.

 영이 더이상 육을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벌

 이쯤 되면 사도 바오로의 절규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낼 수 있습니까?(로마7,24) 우리도 우리를 구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그리고 일상 안에서 회개하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런 분별의 순간이 구원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죄는 무분별한 욕구에서 시작된다.

먼저 자신이 가져서는 안 될 무언가를 동경하고 갈망하는 데서 유혹을 느낀다. 이� 가장 먼저 취해야 할 조치(1단계 의무)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다.

욕구를 거절하고, 자신을 동요시키는 상황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죄를 지었을 �는 더 어려운 의무(2단계의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만큼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켰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신이 저지른 특정한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고 속죄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뉘우치고 통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오히려 금단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또다시 죄를 짓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일단 2단계 의무를 이행하는 데 실패하면 하느님의 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벌은 우리가 생각 하는 것과는 다르다.

 하느님은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을 내려 죄인을 벌하시지는 않는다.

가장 혹독한 벌은 그 죄에 매력을 느께게 되는 것이다.

금단의 즐거움이나 쾌락을 선택할 때 그 죄에 대한 벌은 바로 죄인이 경험하는 쾌락이다.

한번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면 죄인은 더욱더 갈망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느님이 쾌락 속에 버려두신다면 우리는 더이상 저항하지 못하게 된다.

머지않아 우리는 그 덫에 걸려들어 얽매이거나 중독된다.

 

 죄에 걸려들면 우리의 가치체계는 완전히 뒤집힌다. 

악을 가장 바람직한 '선'이요,가장 간절한 바람으로 여긴다.

선을 악으로 오인하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부정한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도록 신이 방해하고 위협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 단계가 되면 회개는 불가능하게 된다.

회개란 정의상 악에서 '돌아섬'이요,

 선을 '향함'기 �문이다.

 그런데 이쯤되면 죄인은 이미 철저하게 선과 악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난 뒤다.

이사야 예언자가 이런 죄인들을 향해 증언한다.

"불행하여라. 좋은 것을 나쁘다 하고 나쁜 것을 좋다 하는 자들!"(이사5,20)

 고삐 풀린 탐욕은 회개하지 않은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며 그 범죄에 딱 어울리는 벌이다.

어떤 사람이 좋지 않은 것을 계속 고집하면 하느님께서는 그의 자제력을 제거하신다.

 로마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꼐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정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느님꼐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정욕에 넘기셨셨습니다...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로마1.24-26.28)

벌을 주시면서도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신다.

하느님은 그들을 욕정과 정념과 그들 스스로 선택한 악행에 '넘겨주신다'

그런데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넘겨주시면'그들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죄를 지으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죄인에 대한 첫 번째 벌이다.

 사람들은 뜻 밖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벌을 죄인에게 가하시는 하느님의 복수로 오해한다.

하지만 잠정적으로 하느님이 내리시는 가장 무서운 벌은 죄인이 스스로 선택한 죄에 애착을 갖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흐려지고 의지가 나약해지면 결과는 뻔하다./

 회개할 힘조차 고갈될 정도로 자신을 몰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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